토론
간이 녹아 사라진 ‘반도체 소년’… 회사는 “술 때문에” [열아홉, 간이 녹았다 2화]
지난 5월 김선우(가명, 23) 씨는 한 통의 우편을 받았다. 발신자는 근로복지공단 경인지역본부. 앞서 제출한 ‘요양급여신청서’에 대한 회신이었다. 약 20개월 만에 돌아온 대답은 ‘불승인’이었다. 고등학생 때 반도체 공장에 취업하고, 1년 만에 간이 다 녹아버려 이식 수술을 받은 청년. 선우 씨의 기막힌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남들처럼 대학을 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차라리 돈을 빨리 벌고 싶었어요.” 선우 씨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고심했다. 통학 거리, 학업 분위기, 대학 진학률은 등은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그가 염두에 둔 건 오직 하나. ‘취업률’이었다. 빨리 돈을 벌어서 가계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마이스터고등학교였다. 정식 명칭은 ‘산업수요 맞춤형 고등학교’로, 직업훈련을 통한 전문기술인 양성을 목표로 한다. 마이스터(Meister)는 ‘장인’이란 뜻. 학교에서 ‘장인’을 육성해 고졸 채용을 확대하겠다는 취지다.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마이스터고는 높은 취업률을 자랑했다. 선우 씨가 입학하기 직전인 2017년에는 졸업자 119명 중 109명이 취업했다. 취업률 91.6%. 돈을 빨리 벌고 싶었던 선우 씨에게는 매력적인 수치였다. 그는 ‘고졸 장인’의 길을 택했다.그는 바람대로 경제활동을 일찍이 시작했다. 전교생 중 가장 먼저 회사로 출근한 ‘1호 취업생’.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해 10월에 반도체 후공정 업체 ‘스태츠칩팩코리아’에 입사했다.임직원만 3038명(잡코리아 2023년 12월 기준)에 달하는 대기업. NICE평가정보가 제공하는 기업신용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기타 반도체소자 제조업’ 분야 매출로 우리나라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큰 회사였다.선우 씨는 1년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4일간 교육을 받았다. 고가의 장비를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주의도 빼놓지 않았다.근무 형태는 새벽, 주간, 야간 4조 3교대. 6일 근무하고 이틀 쉬는 식이었다. 6일 중 하루 이상 연장근무는 필수였다. 그런 날은 작업장에 11시간 30분이나 머물렀다. 식사시간은 50분. 구내식당에서 빠르게 끼니를 때우고 라인으로 돌아오기도 빠듯했다. 이후에는 연장근무 전 30분 휴식을 취하는 게 전부였다.근로시간은 주 51시간 30분.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 한도인 ‘주 52시간’를 넘지 않게끔 맞춰진 시간이다. 24시간 가동되는 공장에 사람의 생체리듬을 맞춰 일했다. 연장근무를 하는 날이면 집에 돌아와 씻지도 못하고 뻗기 일쑤였다. 선우 씨가 맡은 건 칩 어태치(Chip Attach) 공정. 반도체칩에 전자기판을 연결하고 부착하는 등의 일이다. 이때 다량의 화학물질을 다루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솔더 페이스트(solder paste)였다. 여기에는 간독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리, 주석, 은 등이 포함된다. 그 때문에 작업장에는 늘 퀴퀴한 냄새와 타는 냄새, 아세톤 냄새로 가득했다. 선우 씨는 방진복과 얇은 덴탈마스크, 천코팅 장갑, 비닐장갑을 착용했다. 마스크는 입 모양이 다 보일 정도로 얇아 냄새를 막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방진복이 화학물질로 오염되면 집에 가져가 세탁하는 것도 개인의 몫이었다. “블레이드라는 날카로운 날에 용액을 바르고 세척하는 작업을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회사에서 주는 게 천장갑, 비닐장갑이니까 비닐 찢기고 (용액에) 손도 젖고 했죠.” 화학물질 가득한 작업장과 불규칙한 노동시간. 선우 씨는 취업한 지 약 1년 2개월 만에 몸이 망가졌다. 간이 완전히 녹아내렸다. 의료진마저 선우 씨가 살 수 있을 거라 장담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선우 씨와 ‘마지막 인사’까지 나눴다. 다행히 선우 씨는 2022년 1월 간 이식 수술을 받았고,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의 나이는 만 열아홉 살이었다. (관련기사: <반도체 공장 취업한 고교생, 1년 만에 간이 녹았다>)당시 병원은 급성간염을 동반한 독성간질환, 상세 불명의 무형성빈혈, 무과립구증을 진단했다. 적출된 간은 광범위한 출혈성 괴사 상태로, “완전히 녹아내려 형체가 없었다”. 손상 원인을 파악할 수조차 없는 수준.생사의 고비를 넘기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선우 씨는 회사 복귀 또는 퇴사라는 극단적인 갈림길 앞에 섰다. 몸이 좋지 않았던 선우 씨는 회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스태츠칩팩코리아는 기자에게 “사직을 권고한 바 없다”고 해명했으나, 선우 씨 아버지가 기억하는 당시 상황은 달랐다.선우 씨가 죽음의 문턱에서 ‘병원 뺑뺑이’를 도는 동안 아버지는 회사에 병가 휴직을 신청했다. 사측으로부터 “6개월간 병가 휴직을 인정해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기억했다. 덕분에 선우 씨는 2022년 1월 1일부터 병가 상태로 치료를 받았다. 그로부터 약 4개월이 지난 그해 5월, “회사로 복귀하라”는 통보를 들었다.당시 선우 씨는 상처 부위가 제대로 아물지 않아 재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회사에 의사 소견서 등을 보냈으나, “다른 방법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회사가 무단결근 누적을 이유로 퇴사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산재를 신청하면서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무단결근에서 병가로 기록을 정정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완치라는 건 없고, 평생 면역억제제 먹으면서 살아야 돼요. 심지어 앞으로 재이식(수술)이 한 번이 될지, 두 번, 세 번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계속 걱정이 되죠. 경제활동도 차차 해야 되는데….”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격이었다. 2023년 12월 28일 선우 씨에게 정말 고비가 찾아왔다. 몸이 이식받은 간을 거부하며 공격하고 있다는 것. 선우 씨의 면역체계는, 이식받은 ‘타인의 간’을 외부에서 들어온 위험요소로 인식하고 공격했다. 면역억제제를 사용해 공격 정도를 낮추면 간 수치가 나빠졌다.간 이식 수술을 받은 지 3년도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재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위기가 닥칠 거라곤 생각 못했다.선우 씨는 평생 3년마다 간을 새로 이식받으며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혼란스러워했다. 다행히 한 달간 입원 끝에 적절한 약물 배합을 찾아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불안은 늘 곁을 맴돌았다.지난 3년간 든 약값과 치료비만 2억 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돈이 들지는 미지수다. 선우 씨가 언제 다시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 그 또한 불투명하다.선우 씨는 2022년 9월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신청서’를 제출했다. 약값 부담이라도 덜자는 심산이었다. 이때 근로계약서, 급여명세서, 출근부 등 기초적인 자료와 작업환경과 유해요인 관련자료 등을 회사에 요청했다. 하지만 사측은 모두 제공을 거부했다. 공단을 통해 받으라는 답변.‘녹아버린 간’도 문제였다. 어떤 요인이 간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는지 의학적으로 더 따져볼 길이 사라진 셈이었다.선우 씨는 자기 자신이 어떤 화학물질을 다루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사업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발간하는 반도체 작업환경 연구보고서 등과, 자신이 직접 몸으로 겪은 ‘경험’뿐이었다.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업무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특수건강진단’을 받는다. 선우 씨도 2021년 4월 특수건강진단을 받았다.특수건강진단표에 기재된 취급물질로는 간 독성 및 손상을 유발하는 주석, 구리, 이소프로필알콜(IPA) 등 화학물질이 적혀 있었다. 여기에 “급성 간염을 동반한 독성 간 질환은 작업장에서 노출된 미상의 세척 용제에 의한 가능성이 높다”는 주치의 평가 소견서를 덧붙였다. “제가 사용하던 용액에 ‘신체에 접촉하지 마세요’가 적혀 있었어요. 근데 회사는 인체에 무해하다고 주장하니까….” 선우 씨와 주치의는 그의 간 손상 원인이 ‘일 때문’이라 의심했지만, 회사는 다른 것을 의심했다. 바로 ‘술’이었다. 회사는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공식’ 의견서에 이렇게 적었다. “김선우 씨의 음주 습관으로 인한 상병이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회사는 선우 씨의 특수건강진단 결과 ‘절주 또는 금주가 필요하다’는 의사 소견이 있었음을 근거로 들었다. 건강했던 20대 청년이 불과 1년 만에 간이 다 녹아버릴 정도가 되려면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셔야 할까. 선우 씨의 특수건강진단표에는 ‘일주일 1잔, 하루 4잔’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선우 씨는 빈혈 수치, 간장질환 수치 등은 모두 정상이었다. 발병 이후 초진 기록에도, 선우 씨의 음주 습관은 ‘주 1회 소주 1~2병’이라고 적혀 있다. “제가 산재 (신청) 준비하면서 대학병원에 상담을 받았어요. 교수님이 말씀하시기를 20대 초반이 술을 아무리 들이부어도 간이 이 정도로 상하지 않는다고. 외부 (원인의) 개입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절대 (이렇게까지) 상하지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회사가 하는 말이 너무 황당한 거예요.” 회사 관계자들은 선우 씨와 엄마 하영 씨 눈앞에서도 ‘술 때문’이란 주장을 입에 올렸다. 지난해 11월 직업환경연구원이 현장조사를 나갔을 때, 그때도 회사 관계자들로부터 “술을 많이 마셔서 아픈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선우 씨 가슴속의 상처를 후비는 말이었다. 그날 선우 씨는 연구원 2명과 회사 관계자들과 함께 작업장에 들어갔다. 하영 씨는 ‘영업상 기밀 보안’을 이유로 공장 내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선우 씨는 분위기에 압도됐다. 연구원들은 회사 관계자들에게만 질문할 뿐, 선우 씨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선우 씨에게 그날은 마치 “회사의 변명을 듣기 위한 자리”인 것 같았다. “회사 관계자가 ‘용액이 손에 직접 닿을 일이 없다’고 말하면, 연구원이 ‘그렇군요’ 하고 넘어가는 식이에요. 제가 직접 겪은 건데, 저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요. 실제로는 비닐장갑이 찢어지면 손에 직접 닿아서 젖고 하거든요. 그때 느꼈어요. (이 조사는) 내 말을 들으려고 온 게 아니고, 그냥 업무 하나를 처리하러 온 거구나.” 선우 씨는 그날 직감했다. ‘산재 승인이 안 되겠구나.’ 선우 씨는 그 뒤에 직업환경연구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현장 조사에서 하지 못한 말들을 적었다.산재 신청 이후 약 1년 8개월의 기다림 끝에 결과가 나왔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 5월 ‘불승인’을 통보했다.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우선 “급성 간염을 동반한 독성 간질환은 확인되고, 개인적인 발병요인도 확인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하지만 위원 7인 중 6인은 “독성 간염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물질의 노출이 없어 업무 관련성은 낮다”고 봤고, 1인은 “작업 중 간독성 물질이 일부 있으나, 독성이나 노출량을 고려할 때 상병을 유발할 수준은 아니다”라고 판단해 전원 불승인 결정을 내렸다. “소송으로 (산재 승인을) 다투려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회사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없잖아요.” 선우 씨는 지난 8월 산재 불승인 결과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 몇 년이 걸릴지, 어떤 판결이 나올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소송이 진행되는 그 긴 시간 동안 선우 씨와 가족들이 더 지치고 힘들어질 거란 사실만은 분명하다.하지만 그 불확실한 미래에 한 번 더 희망을 걸었다. 열아홉 나이에 녹아버린 간. 그의 간을 사라지게 한 원인을 찾는 일도, 그의 남은 인생도 아직은 포기할 수 없기에.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스태츠칩팩코리아의 반론을 듣고자 지난달 19일부터 약 30차례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지난달 30일 기자는 인사팀 관계자, 안전팀 관계자, 임원급 관계자와 번갈아 소통했다. 이들은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판단에 이견이 없다”, “절차에 따랐고 오히려 선우 씨를 도우려고 했다”고 입장을 밝혔다.덧붙여 “(셜록 보도로 인해) 회사에 피해가 발생하면 법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그리고 지난 2일 안전팀 관계자는 기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김선우 씨에게) 사직을 권고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했다”며, “회사는 ‘김선우 씨에게 헌혈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사내에 공지해 도움을 줬다”고 강조했다.산재에 관한 사측의 의견은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문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스태츠칩팩코리아는 보험가입자의견서에 “해당 작업은 회사 창립 후 수십 년간 이어온 공정이며 그동안 동일 상병 혹은 유사 상병이 발생된 적 없다”고 주장했다.이어 “김선우 씨의 음주 습관으로 인한 상병이 아닌지 합리적 의심이 가능한 상황”이며, 작업환경측정결과와 역학조사 결과 기록을 보면 유해인자에 대해 “불검출 또는 검출한계 미만”임이 확인된다고 밝혔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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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공장 취업한 고교생, 1년 만에 간이 녹았다 [열아홉, 간이 녹았다 1화]
크리스마스 캐럴 대신 아우성이 울려 퍼지는 병원 응급실. 그 틈에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된 김선우(가명) 씨가 있었다. 그는 엄마 이하영(가명) 씨에게 몸을 지탱한 채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리고 있었다. “당장 간 이식하지 않으면 아드님 죽을 수도 있어요.” 졸음이 쏟아지는 순간에도 날카로운 의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몸이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건 (2021년) 10월쯤이에요. 그때 부딪힌 적도 없는데 몸에 멍이 들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제 성격이 워낙 덜렁대니까 그냥 어디 부딪혔겠지, 하고 넘어갔죠.” 선우 씨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20년 10월, 반도체 후공정 업체 ‘스태츠칩팩코리아’에 입사했다. 집은 울산, 회사는 인천에 있었다. 그는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화학물질 가득한 작업장. 3교대 근무. 열아홉 고등학생 선우 씨는 그해 모교의 ‘1호’ 취업생이라는 자부심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몸에서 이상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건 입사한 지 1년 만인 2021년 10월. 몸에 멍이 들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으면 메스꺼워 구토가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다. 먹은 음식을 다 토해도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저 교대근무에 누적된 피로 탓이라고 여겼다. 코피를 쏟는 날도 있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지혈이 안 돼 회사 인근 이비인후과에서 코 혈관을 지졌다. 다음 달에도 코피가 쏟아졌다. 공장 안 화장실에 앉아, 반쯤 남은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다 뜯어 썼다. 그래도 코피가 멎지 않았다. 선우 씨를 찾는 파트장의 전화. “코피가 멈추지 않는다”고 대답했지만, 빨리 복귀하라는 말만 돌아왔다. 그렇게 두 시간이나 지났다. 그제야 코피는 간신히 멎었다.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마저 닦아내고 자리로 복귀했다. 잠이 쏟아졌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싶었다. “선우야, 너 얼굴이 좀 누런 것 같다.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니야?” 결혼기념일을 맞아 울산 본가에 온 선우 씨에게 엄마 하영 씨가 말했다. 최근 한 달간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던 선우는 일 때문에 피곤할 뿐이라고 답했다. “엄마의 촉이라는 게 있잖아요. 오랜만에 아들이 집에 와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니까 이상해요. 너무 노래. 근데 선우도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하지, 애 아빠는 둔감하니까 그런 거 잘 모르겠다고 하지…. 그때 같이 병원 가자고 못했던 게 제일 후회돼요.” 몸이 지쳐도 주기적으로 통장에 찍히는 급여를 보면 ‘그래도 할 만한 일’이라고 여겼다. 일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1년이 넘은 스무 살짜리 사회초년생은 요령 없이 버틸 뿐이었다. 한 달이 지난 12월 23일, 교대근무를 하던 동료도 선우 씨를 걱정했다. 황달이 있는 것 같으니 병원을 가보라는 말. 그저 피곤해서 낯빛이 안 좋다고 하기에는 눈자위까지 너무 노랗게 변했다. 밤 10시를 넘긴 시간. 회사 주변에 그 시간에 문을 여는 병원은 없었다. 선우 씨는 두 달째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렸다. 새벽조, 주간조, 야간조 어디에 투입되든 눈뜨는 게 힘겨웠다. 이튿날 오전 병원에 가려 했지만, 늘어진 잠으로 갈 수 없었다. 이튿날 오후 누렇게 뜬 얼굴로 출근했다. 상사는 선우 씨의 안색을 살피더니 병원에 가라고 조퇴를 시켜줬다. 뜻밖의 배려. 평소 같으면 ‘열이 없으면 감기에 걸려도 출근하라’던 상사였다. 선우 씨는 그제야 병원을 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가까운 내과로 향했다. 의사는 황달을 치료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며, 근처에 있는 인하대학교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피 검사를 마친 선우 씨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대학병원은 평일 오후에도 환자들로 북적였다. 순서가 되려면 30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때 간호사가 선우 씨 이름을 불렀다. 앞서 방문한 환자들을 뒤로하고 진료실로 먼저 들어갔다. “당장 입원 안 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바로 입원하세요.” 선우 씨는 그제야 심각성을 느꼈다. 의사는 일반인의 정상 간 수치(ALT)가 40IU/L 이하인데, 선우 씨의 간 수치가 2236U/L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혈소판도 말썽이었다. 당시 선우 씨의 혈소판 수치는 혈액 1㎕(마이크로리터)당 5000개. 정상인들의 혈소판 수치가 1㎕당 15~40만 개 사이인 것을 고려하면 현저히 부족한 수치였다. 코피가 한두 시간씩 멈추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엄마, 나 몸이 안 좋아서 병원 왔는데 당장 입원해야 될 것 같대.”“몸이 안 좋아? 입원해야 되는 거면 여기 내려와서 입원해도 되지 않아?” 전화로 다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은 현실감이 없었고, 졸음이 쏟아지는 것 말곤 통증도 없었다. 간 수치가 정상의 약 56배 이상 나왔다는 것도, 혈소판 수치가 80배 적게 나왔다는 것도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몸이 많이 좋지 않은가 보다 할 뿐이었다. 엄마의 말에 선우 씨는 비행기를 타고 울산 본가로 갔다. “이 몸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울산대학교병원 의사는 혈액검사 결과지를 보고 질겁했다. 간 이식이 필요할 만큼 심각한 수치였다. 의사의 말에 하영 씨는 눈앞이 노래졌다. 그렇다고 당장 입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의사는 “아직 우리 병원은 간 이식을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며, 부산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했다. 하영 씨는 옆에서 눈을 껌뻑이며 졸음을 참는 아들을 차에 태웠다. 한시가 급했다. 하지만 도로는 북새통을 이뤘다.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거의 다 왔어, 선우야. 조금만 버텨. 괜찮지?” 평소 4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 꽉 막힌 도로 위에 두 시간을 넘게 갇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은 아들을 보면 조급해졌다. 초행길, 꽉 막힌 도로, 옆자리에는 쓰러져가는 아들까지. 운전대를 잡은 하영 씨의 손이 덜덜 떨렸다. 혹여나 아들이 눈을 감으면 다시 깨어나지 못할까봐…. 부산에 진입해 가장 가까운 소방서를 찾았다. 하영 씨는 ‘미친듯이’ 뛰어 들어가 소리를 질렀다.  “제발 우리 애 좀 도와주세요!” 엄마의 외침에 구조대원들은 선우 씨를 구급차에 태웠다. 사이렌을 울리니 꽉 막혀 있던 도로에도 숨통이 트였다. 하영 씨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당시는 코로나19 위기대응 수위가 높던 때.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을 찾아가도 대기 환자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잘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휴가를 낸 의사들도 많았다. 하영 씨의 속이 타들어 갔다. 선우 씨는 구급차를 타고 세 번째로 찾아간 병원에서 겨우 병상에 누웠다. 그마저도 치료가 아닌 ‘응급조치’였다. 하영 씨는 서울로 가야 아들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2021년 12월 27일 새벽 6시, 선우 씨를 사설 구급차에 태웠다. 서울에 있는 ‘빅5’ 병원 중 하나인 A 병원으로 향했다. “예약 안 하셨으면 진료받기 어려우세요. 오늘은 돌아가시고 예약하신 날 방문해주세요.” 기대와 달리 병원의 대처는 냉담했다. 하영 씨는 속이 뒤집혔다. ‘절차’대로 하라는 말. 혈액검사 결과지를 들이밀어도 같은 답이 돌아왔다. 병원 인근 숙소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남는 방도 없었다. 택시에 선우 씨를 태우고 또 이동했다. 겨우 찾은 모텔 방에 아들을 눕혔다. 하영 씨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이른바 ‘잘사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아는 병원 없냐, 아는 의사 없냐, 제발 도와달라. 당장 아들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었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모자는 이튿날 ‘절차’대로 예약 진료를 받았다. 당장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 하지만 이번에는 남은 병실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병원에서는 해가 바뀌고 1월 10일이나 돼야 자리가 생길 거라고 했다. 서울 외곽까지 범위를 넓혀봐도, 선우 씨가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은 없었다. 수소문한 끝에 한 곳을 찾아냈다. 경기 부천시에 있는 병원이었다. 선우 씨는 그곳에서 일주일간 머물렀다. 혈소판을 수혈받고, 코피가 흐르면 ‘땜질’을 했다. 치료가 아니라 ‘조치’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2021년 마지막 날, 드디어 대학병원 특실에 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왔다. 지옥 같던 ‘병원 뺑뺑이’는 8일 만에 막을 내렸다. 병원에서 맞는 새해. 그래도 이제는 치료에만 전념하면 좋아질 거라 여겼다. 하영 씨는 ‘이젠 다 잘될’ 거라며, 아들의 걱정까지 떠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님, 지금 선우 씨가 너무 위험해요. 피가 안 멈추고 간 수치가 너무 안 좋아요. 바로 병원으로 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불안한 일상은 금세 무너졌다. 가족들은 울산의 집에서 서울의 병원까지, 350㎞ 거리를 단숨에 달려갔다. 당시 선우 씨는 간 이식 대기자 ‘0순위’였다. 장기 기증자가 나타나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이식받는 사람. 그만큼 상태는 위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장기 기증자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선우 씨는 간성혼수에 빠졌다. 혼수상태에 빠진 채 열흘이 지나자 주치의가 말했다. 염증 수치가 높아져 다른 장기에 영향을 주고 있으니 위독하다고. 몸에서 간을 먼저 떼어내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거예요.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포기해요. 그(간을 떼어낸 뒤) 4일 동안 기증자가 안 나타나면 우리 애는 그대로 죽는다는데. 도저히 안 된다고, 죽어도 못한다고 싸웠죠.” 병원에서는 선우 씨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주치의는 잠든 선우 씨에게 ‘마지막 배웅’을 하라며, 가족들에게 면회 기회를 주곤 했다. 하영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절히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매일 병원 가까운 절로 향했다.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을 기증해줄) 뇌사자가 나타나기를 기도하는 게… 누군가 죽어야 우리 선우가 사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엄마니까 그런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죠. 그게 스스로도 너무 괴로운 거예요.” 입원 20일 만에 기증자가 나타났다. 밤까지 기도를 올리던 하영 씨는 한달음에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반기는 건 병원의 낯선 공기였다. 의료진은 선우 씨의 이식 수술을 두고 찬반 토론을 했다. 의료진 10명 중 수술을 반대하는 사람은 8명. 수술 성공 확률이 30%로 너무 낮다는 이유였다. 생존 가능성이 더 높은 다른 대기자에게 이식하는 게 맞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엄마 하영 씨의 귀까지 전해졌다. 그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가족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했다. 수술에 호의적인 의료진 두 명이 “그래도 아직 스물한 살이고 젊은데, 회복이 빠를 수 있으니 한번 해보자”고 밀어붙였다. 가족들의 호소와 의료진들의 설득 덕분에 선우 씨는 2022년 1월 19일 자정이 가까운 시간 수술대에 올랐다. 10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 선우 씨의 간이 몸 밖으로 나왔다. 의료진은 “간이 완전히 녹아내려 형체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조직검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손상됐다. 간이 녹아버린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이 사실은 훗날 선우 씨 가족에게 또 한 번의 절망을 안겨주게 된다. 수술이 끝나고 긴 잠에서 깬 선우 씨. 수술 전 약 2주 동안의 기억이 사라졌다. 간 손상이 심해 뇌의 인지기능도 떨어졌다. 배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십자 모양의 수술 자국이 남았다. 커다란 흉터는 통증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제 청춘을 빼앗긴 기분이죠.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하필 내가 아파야 하는 걸까. 저는 그냥 취업을 빨리 하고 싶었던 건데.”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을 알고 있던 선우 씨는 일찍 철이 들었다. 빨리 돈을 벌어 부모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어서 마이스터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등급생 중 ‘1호’로 서둘러 취업했다. 첫 월급을 받은 때부터 매달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 그 보람은 선우 씨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선우 씨는 수술 4개월 뒤인 2022년 5월 회사를 나왔다. 회사를 퇴사한 과정에 대해서는 선우 씨와 사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선우 씨는 “사직서와 같은 문서에 서명한 기억이 없다”고 주장했고, 회사는 “사직을 권고한 사실이 없다”고 강조했다. “지금 당장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는데, 돈이 계속 나가니까 죄송하고 눈치 보이죠. 생활에 제약도 많고, 친구들처럼 놀지도 못하고. 회복하더라도 약값은 계속 평생 나가니까 그것 때문에 산재 신청을 한 건데, 만장일치로 기각됐더라고요.” 그해 9월에는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기 위해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신청서’를 제출했다. 답변을 듣기까지 1년 하고도 8개월이 더 걸렸다. 결과는 ‘불승인’. 2024년 5월에 나온 답이다. “산재 승인 안 되면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판정위원) 전원 불승인이라고 하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제가 사업장에 문제가 있다고 (근로복지공단에) 말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제 의견은 하나도 반영이 안 돼 있고, 그냥 회사가 하는 말만 있더라고요.” 반도체 공장에 들어간 열아홉 고등학생 선우 씨는 1년 만에 간이 녹아내렸다. 평생 약을 복용해도 언제 또 건강이 악화될지, 재수술을 몇 번이나 하게 될지 알 수 없다.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반도체 소년’. 그는 가혹한 세상에 홀로 내던져졌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스태츠칩팩코리아의 반론을 듣고자 지난달 19일부터 약 30차례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지난달 30일 인사팀 직원과 연락이 닿았다. 그는 “사건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며 추후 연락 줄 것을 요청했지만, 3시간 뒤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안내드리기 어렵다, (산재와 관련한 일은) 근로복지공단 쪽에 문의해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시 총무팀을 통해 연결된 안전팀 관계자는 “연중 2회 안전교육을 수행하고 있다”는 등 약 40분간 안전관리 방침에 대해 설명했지만, “자신이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며 비보도를 요청했다. 또 한 번 인사팀 임원급 관계자에게 연락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판단에 이견이 없다”며, “회사는 절차에 따랐을 뿐 특별히 근로자(김선우 씨)와 분쟁적인 이슈는 없었다”고 답했다. 그리고 지난 2일 안전팀 관계자는 기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김선우 씨에게) 사직을 권고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했다”며, “회사는 ‘김선우 씨에게 헌혈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사내에 공지해 도움을 줬다”고 밝혔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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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꽁꽁 얼어붙은 세계 위를 반도체가 걸어다닙니다
요즘 테크, 경제 부문에서 반도체만큼 주목받는 주제가 있을까요? 또 제대로 논해보자면 반도체만큼 국제, 외교, 과학기술, 국내 산업 동향과 정책까지 모든 분야를 파고들어야 하는 주제도 없죠. 그래서 폴라리스가 눈이 번쩍번쩍해지는 광활한 반도체의 바다에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엔비디아가 연 3세대 시장의 주요 반도체와 기업 핵심 요약 정리, 레이스 너머의 패권 전쟁, ‘반도체 강국’이라는 대한민국의 상황까지. 이상 탐사 정보 브리핑이었습니다. 그럼 모두 준비 되셨나요? 3, 2, 1. 반도체로 딥다이브! "기술은 경쟁의 주도권을 결정하고, 혁신은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칩워>, 크리스 밀러 #1 엔비디아, 왜 난리래? 요새 여기저기서 ‘엔비디아’란 이름 많이 들어보지 않으셨나요? 엔비디아가 장안의 화제인 이유는 이 기업의 주가가 4개월 만에 두 배 가량 뛰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AI 반도체가 있었죠. 현재 엔비디아는 전 세계 AI 반도체 시장의 90% 이상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어요. AI와 반도체, 그리고 AI 반도체는 무엇이고 어떤 관계일까요? AI는 인간의 학습능력과 추론능력을 컴퓨터 과학으로 구현한 기술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2020년대 이후 발전한 생성형AI는 딥러닝으로 빅 데이터를 학습해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인공지능을 뜻합니다. 비비의 밤양갱을 아이유가 부른 것처럼 만든다던가, 프롬프트에 명령을 입력하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등 현재 생성형AI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죠. 생성형AI 산업은 반도체 없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생성형AI가 학습할 빅 데이터를 저장하고, 비메모리 반도체는 생성형AI를 구현하기 위한 초고속 계산을 하기 때문이에요. 메모리 반도체는 저장 기능을 수행하는 반도체입니다. 한국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강한 분야죠. 비메모리 반도체는 명령을 실행하는 반도체입니다. 비메모리 반도체의 제작 단계는 설계(팹리스)와 생산(파운드리), 검수(디자인하우스)로 나뉘어 있어요. 이중 우리가 AI반도체라고 부르는 것은 비메모리 반도체에 속합니다. 비메모리 반도체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요? AI 반도체는 아직 딱 정의되진 않았습니다. AI에 사용하는 반도체 모두(CPU, GPU, NPU)를 AI 반도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AI 맞춤형으로 제작된 반도체만(NPU) AI 반도체라고 하는 사람이 있죠. 엔비디아는 이중 현재 AI 데이터 센터 구축에 필요한 핵심적인 반도체인 ‘GPU’를 만듭니다. 이 GPU, 다른 기업도 만들 수 있지 않나요? 왜 엔비디아가 시장을 독점하고 있을까요? 엔비디아가 현재 AI 반도체 시장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이유는 ‘쿠다(CUDA, Compute Unified Device Architecture)’라는 소프트웨어 덕분입니다. ‘쿠다’는 엔비디아에서 무료로 배포한 AI 개발 플랫폼이예요. 약 10년 동안 ‘쿠다’를 기반으로 전 세계 AI 개발 생태계가 형성되었는데, 이 ‘쿠다’는 엔비디아의 GPU에서만 작동합니다. 이미 전 세계의 많은 개발자들이 이 ‘쿠다’라는 플랫폼에 익숙한 나머지 다른 GPU를 사용하기가 힘든 환경이 형성되었다고 해요. 생성형AI를 개발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하나에 5천만 원까지 호가하는 엔비디아의 GPU를 울며 겨자먹기로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이에 여러 기업들이 엔비디아의 독점 체제를 깨겠다고 나섰습니다. 인텔은 엔비디아의 AI 반도체인 ‘H100’의 대항마로 ‘가우디3’를 내놨습니다. 앞으로 반도체를 둘러싼 세계 시장은 어떻게 변할까요? 전 세계 반도체 역사와 이를 둘러싼 쟁점을 담은 책 <칩워>의 저자 크리스 밀러 미 터프츠대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면 감이 잡히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보러가기 #2 두 세계 이야기: TSMC와 삼성전자 엔비디아 주가가 4월 말인 지금은 고점에서 살짝 떨어졌죠. 하락장이 본격 시작한 날은 대만에서 25년 만에 가장 강한 지진이 났던 지난 4일이었습니다. 지진 때문에 TSMC가 공장 가동을 멈췄거든요. 지난 글에서 잠깐 언급됐던 TSMC, 대체 얼마나 중요한 기업이기에 그럴까요? TSMC는 여러 업체에서 설계한 비메모리 반도체를 대신 맡아서 생산해 주는 기업입니다. 엔비디아에서 설계(즉, 팹리스)한 AI 반도체를 대신 생산(파운드리)해주는 곳도 TSMC입니다. 비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 TSMC가 갖춘 영향력은 상당히 센데요, 팹리스-파운드리 구조를 만든 기업이 TSMC거든요. 1980년대 말 탄생해 시장을 개척하며 ‘고객사에 도전하지 않는다’는 전략과 우수한 기술력으로 전 세계에서 고객을 모았죠. 그 결과 전체 파운드리 시장에서 약 60%를 차지하는 기업이 됐습니다. 엔비디아가 AI 개발 플랫폼을 독점하면서 AI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 것처럼, TSMC도 비메모리 반도체 생산을 반쯤 독점하면서 무시할 수 없는 기업이 된 거예요. 지진으로 TSMC 공장이 멈췄다는 소식에 엔비디아 주가가 요동친 건 지극히 당연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물량이 막혀 장사를 못 할지도 몰랐으니까요. 재밌게도 창업자 모리스 창은 창업한 뒤에도 몇 년간 지금 본업과 다른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고려했다고 해요. 한 기업에서 초청받아 공장을 방문한 뒤, 그는 생각을 접고 파운드리 사업에만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전자입니다. 삼성전자는 당시 세계 1위였던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상당히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갓 시장에 뛰어든 TSMC가 따라잡기 어려웠습니다. 삼성전자는 기어이 세계 1위를 차지했고, SK하이닉스도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한국은 반도체 강국이 됐습니다. 그런데 메모리 반도체의 위상이 예년만 못합니다. 비메모리 반도체가 AI와 함께 반도체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코로나19로 활황을 맞았던 전자기기 시장이 가라앉는 과정에서 큰 손실을 봤거든요. 활황을 맞아 메모리를 많이 생산해 뒀는데, 시장이 가라앉으면서 재고를 떠안은 겁니다. 두 기업이 믿는 구석은 HBM, 고대역폭메모리라는 제품입니다. 원래 램 한 개가 들어갈 자리에 램을 몇 개씩 쌓아 올려서 성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제품입니다. 많은 정보를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AI 반도체에 필요합니다. HBM을 아주 잘 만드는 회사가 두 기업입니다. SK하이닉스는 HBM이란 개념을 창조한 회사고요, 엔비디아에 납품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엔 TSMC와 협력하기로 했어요. 삼성전자는 그런 SK하이닉스보다 HBM 기술 경쟁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고요. 그렇지만 지금은 메모리 반도체만으로 미래를 그리기에 부족한 시대입니다. 비메모리와 파운드리에서 무언가 보여줘야만 해요. 다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외교입니다. 자, 잠시 세계를 무대로 한 권투 링으로 가볼까요? 깊이 읽어볼 기사로는 지난 2021년 매일경제에서 발행한 TSMC 관련 기사를 준비했습니다.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잘 설명해 읽을 만해요. 🧭글 보러가기 #4 한국은 어떡하나  이 밥그릇 싸움에서 한국은 과연 제 몫을 지킬 수 있을까요? 대외적으로 한국의 위치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효자 특산물’인 메모리 반도체의 입지는 좁아졌거든요. 전문가들도 지난 2년 새 메모리 중심인 국내 산업구조의 약점이 확연히 드러났다고 평가하고요. 설상가상 믿었던 메모리 반도체의 수출액은 5년 사이 반토막이 났고, 현재 고공성장하는 비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한국은 3.3%의 낮은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어요. ‘아니 그럼 기업은 뭐하고 있지?’ 의문이 드실텐데요. 기업들도 반도체 전선에 갇혀 엔비디아 독주를 용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쿠다 대항마 만들기, 자립 첨단 반도체 만들기, 틈새 국가로 진출해 독점적 지위 확보하기. 다양한 방법으로 저마다 경쟁력을 높이고 있죠. 그중 쟁점은 비메모리 분야, 특히 빅테크와 같은 대형 고객사의 수주를 따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성능이 좋은 상품을 내놓고, 첨단 공정기술을 탑재해야 할 테지요.  ‘반도체 산업 터줏대감’인 삼성전자도 비장의 무기를 준비중입니다. 최첨단 기술 개발에 집중하는 모습인데요. 차세대 반도체 핵심 기술인 *GAA 공정(Gates All Around)을 3나노 반도체부터 먼저 적용하며 2나노 반도체부터 GAA 공정을 적용하는 TSMC를 견제했습니다. 수율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목표죠. 또한,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대표적인 AI 메모리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선두권을 두고 경쟁중이고요.  (*GAA 공정 = 말 그대로 ‘모든 면에서’ 전류가 흐르는 구조인데요. 데이터 처리 속도와 전력 효율을 높일 수 있습니다.)  주요 나라와 산업이 앞다투어 뛰어드는 형국, 정부의 지원이 필요해보이는 대목입니다. 이미 미국은 반도체법을 통해 ‘자급자족’ 첨단 반도체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고, 이에 삼성전자도 파운드리 팹 조성을 조건으로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 9조 원을 받기도 했죠. 미국의 큰손, 대형 고객의 수주를 딸 수 있을지 혹은 남의 나라 좋은 일만 해주게 될지는 두고 봐야겠습니다. 한국도 나름 기업 지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요. 정부는 최근 한국형 칩스법, 이른바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경기 남부에 조성해 ‘메모리 파운드리’ 생산 중심지를 2040년까지 만들겠다 발표했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622조원을 투자하고, 정부는 세제 혜택과 전력, 용수 등 인프라 구축, 인력 양성 등을 지원한다는 계획입니다. 더불어, 반도체 투자세액공제를 25%까지 확대하고 올해 반도체 지원 예산을 지난해보다 2배 이상 늘렸습니다. 일각에서는 이와 같은 국가적 지원이 재벌 특혜, 부자 감세라고 비판하는 반면, 안보 경제가 달린 문제인 만큼 필연적이라는 의견도 있고요. 전문가의 빅픽쳐는 조금 다릅니다. 기업에만 의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연구·개발(R&D) 지원이라는 입장이죠. 예컨대, 기업들의 R&D 자금이나 시설 투자에 인센티브를 늘리면 그 자금이 기업에만 머무르지 않고 대학과 연구기관까지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인데요. 다만, 반도체 관련 R&D 예산 삭감의 여파로 성장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실제로 내년 정부 예산은 지난해 대비 크게 축소됐는데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연구 부문은 26% 감소율을 기록, 중소/중견 팹리스기업을 육성, 지원하는 예산 역시 200억원이나 감소했습니다. 쉽지 않은 싸움. 한국 반도체 산업이 마주한 단기, 장기간 과제를 뚫을 돌파구가 요원해보입니다. 🧭글 보러가기 에디터가 남긴 편지  이번 레터를 준비하며 <칩워>를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흥미로웠던 부분을 소개하자면 저자인 크리스 밀러가 현대 역사의 분기점이 된 군사력을 제2차 세계대전의 강철과 알루미늄, 냉전 시대 핵무기, 그리고 현재 미·중 패권 싸움의 ‘컴퓨터의 힘’(computing power)이라고 보는 점이었어요. 우리가 매일 끼고 자는 스마트폰부터 저 멀리서 날아가는 미사일까지, 반도체는 우리가 먹고살 거리부터 군사력까지 관여하지 않는 곳이 없더군요. 반도체 산업이 중요하다는 건 이제 알겠습니다. 그런데 레터를 준비하면서 여러 기사를 읽어보고, 책을 읽었을 때 어딘가 찜찜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삼성과 하이닉스와 같은 대기업은 주가, 즉 숫자로만 산업을 평가합니다. 실적을 까고 보니 예상보다 돈을 많이 벌었다, 예상보다 돈을 벌지 못했다는 식으로요. 좀 더 찾아보니, 이 거대하고 굳건해 보이는 산업의 이면에는 황폐하고 허약한 구조가 있었습니다. 먼저 질병 산재 문제입니다. 2007년,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급성 백혈병을 얻은 황유미 씨가 23살에 돌아가셨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 후 반도체 노동자 인권 단체 반올림이 출범했고, 황유미 씨가 사망하고 10여 년이 지나서야 삼성전자는 중재 협약을 통해 반도체 노동자들에게 사과와 보상, 재발 방지를 약속했습니다. 여전히 반도체 노동자들은 일하다 죽고, 일하다 병에 걸려도 사회와 기업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구조는 반도체 산업뿐만이 아니라 첨단산업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다음으로 물 문제입니다. 반도체 공정에는 깨끗한 물이 필요합니다. 반도체 기업이 하루에 사용하는 물의 양은 107만 톤에 달합니다. 첨단산업이 발전하면서 앞으로 반도체 수요는 늘어날 것이고, 이에 따른 물 사용량은 지금의 3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 가뭄과 폭우의 주기가 잦아져 점점 더 물을 저장하기 힘들어집니다. 지역에서는 변기 내릴 물도 없어 밖에서 볼일을 해결하거나 마실 물도 없다는데, 정부와 기업이 계획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인근 팔당댐에서도 물을 공급할 수 없어 강원 화천댐의 물까지 끌어 쓸 계획이라고 합니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을 착취해 반도체 산업을 지속한다면 우리가 얻게 될 것은 무엇일까요? 어마어마한 경제적 수익과 모두가 두려워할 세계 최강의 군사력? 그러나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고 ‘잘 살고 부강한 나라’를 얻는다고 무엇이 달라질까요. 아무도 없는 황량한 도시에서 칩 하나만 덩그러니 살아남는 미래가 되지 않길 바라며 레터를 마칩니다. 에디터 선심🔆 드림 만든 사람들: 선심🔆, 보라 🍇, 푸릇 🌿, 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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