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원망도 미련도 없이… “제가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누가 아버지를 죽였나 20화]
붉은색으로 염색한 풍성한 머리로 이마와 뒷목을 덮은 청년이 스타벅스에 나타난 건 늦은 오후였다. 검은색 뿔테 안경과 오른 손목의 은색 팔찌는 조명으로 더 반짝거렸다. “접니다, 기자님….” 키 180cm쯤 되는 호리호리한 청년은 내가 앉은 자리로 걸어와 고개를 숙였다. 검은색 셔츠 탓에 붉은색 머리카락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저 도영입니다. 강도영.” 그럴 리가.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가 씩 웃었다. 하얀 이가 도드라졌다. 3주 전에 가석방으로 출소한 사람 치고 너무 알록달록한 거 아닌가 싶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아는 강도영(가명)과 체격이 너무 달랐다. “저 강도영 맞습니다. 편지로 살 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교도소에서 60kg 정도 뺐습니다.” 강 씨는 뇌출혈로 온몸이 마비된 아버지를 간병하다 사망에 이르게 한 존속살해 혐의로 2021년 8월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그해 11월 프로젝트 ‘누가 아버지를 죽였나’를 통해 그의 사연을 자세히 보도했다.  간병노동과 영케어러(young carer)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떠올랐다.(관련기사 : <“쌀 사먹게 2만원만..” 22살 청년 간병인의 비극적 살인>) 그때 법정에서 본 강 씨는 130kg의 거구였다. 대구교도소에서 면회했을 때도 인상은 비슷했다. 면회실 투명창 너머의 강 씨는 몸집이 크고, 얼굴은 둥글고, 표정은 어두웠다. 그를 직접 본 건 그 두 번이 전부였다. 지난 7월 30일 가석방으로 출소할 때까지 셜록은 그와 편지로만 소통했다. 지난 8월 20일, 대구 그랜드호텔 1층 스타벅스에 반쪽이 된 얼굴로 나타난 그를 알아보지 못한 건 당연했다. 무엇보다 ‘강도영 알아보기’를 방해한 건 내 가슴속 편견이었다. 존속살해 혐의로 복역 후 갓 출소한 가난한 청년은 머리 염색이나 액세서리를 하지 않을 테고, 웃음기 없는 위축된 얼굴이나 울분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란 고정관념 말이다. 편견을 버린 뒤에야 ‘병든 아버지를 굶겨죽인 패륜아 사건’의 숨겨진 진실이 보였던 2021년 11월 그때처럼, 나는 내면의 생각부터 정리해야 했다. 살인범이란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야 하는 스물다섯 살 강도영과의 대화는 그 후에야 가능할 듯했다. 이렇게 다짐을 해도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저기… 편지로 이야기한 대로, 많은 사람이 도영 씨 근황을 궁금해 해요. 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사람도 많구요.” 강 씨는 ‘패륜살인 가해자’로 언론에 처음 등장했다. 셜록의 보도로 그를 향한 여론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뀌었다. 밥을 사고 싶다는 사람부터 복지 혜택을 알려주겠다는 사회복지 공무원까지, 강 씨의 안부를 묻는 독자의 문의는 최근까지도 이어졌다. “관심은 고맙지만, 기자님과 인터뷰를 끝으로 저는 세상에서 조용히 잊히고 싶습니다. 제가 잘난 일을 해서 관심 받은 것도 아니고….” 오래 생각한 일인 듯 강 씨의 낮은 목소리는 단호했다. 가석방으로 출소한 지 약 3주가 된 때, 강 씨는 친구 집에 머물고 있었다. 출소 후 주민등록을 마치자마자 그에게 날아온 건 돈을 갚으라는 독촉장이었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채무였다. 강 씨는 상속 포기 등 생소한 일을 처리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다. “예전에 아버지랑 살던 집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거기서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사망하고 자신이 용의자로 체포된 현장, 그의 옛집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그의 근황만이 아니라 정말로 누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하는지, 그때의 이야기를 강 씨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터뷰 장소와 날짜가 잡혔다. 9월 6일,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이 대구 하늘은 회색빛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다세대 주택이 빽빽한 골목 사이로 덥고 습한 바람이 불었다. 강 씨는 역시 ‘컬러풀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가 아버지와 함께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을 내고 살던 다세대 주택의 2층은 비어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그날부터 쭉 그랬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의 마당 한쪽 구석에서 저 혼자 높이 자란 엄나무의 이파리만 무성했다. “저 때문에 세입자가 안 들어오는 건가 싶어, 1층에 살던 주인집 할머니에게 죄송하네요. 아버지 쓰러지고 3개월 정도 됐을 때, 그 할머니가 10만 원도 빌려주셨는데….” 강 씨의 아버지는 2020년 9월 13일 뇌출혈로 쓰러졌다. 강 씨는 군 입대를 앞둔 21세 휴학생이었다. 갑자기 간병청년이 된 그에겐 돈이 없었다. 약 2000만 원에 이르는 아버지 치료비를 삼촌이 댔다. 아버지가 사망한 이듬해 5월까지, 월세·도시가스·전기요금·통신료 등 모든 게 밀렸다. 당시 강 씨는 집주인 할머니에게 10만 원을 빌렸다. 강 씨가 외부인에게 빌린 유일한 돈이다. 그의 삼촌도 더는 병원비를 댈 수 없게 된 2021년 4월 23일, 강 씨는 사지가 마비된 아버지를 퇴원시켜 집에서 간병했다. 약 보름 뒤인 5월 8일, 아버지는 안방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 지경이 될 때까지 그는 왜 공공기관에 도움 요청을 하지 않았을까. “공적 도움을 아예 안 알아본 건 아니에요. 주민센터에 전화로 물었는데 ‘아버지 장해진단서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그 진단서를 받으려면 사설 앰뷸런스 이용 등 최소한 10만 원 이상이 들더라구요. 그때 저는 쌀값 2만 원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 돈을….” 강 씨는 당시 친구들에게도 사정을 말하지 않았다. “가장 후회하는 부분이에요. 친구들이 ‘왜 우리에게 말을 안 했느냐’고 저를 질책하더라구요. 제 성격 탓이에요. 저는 친구들에게 신세 지기 싫었고, 그게 타인에게 부담 주지 않는 배려라 여겼어요. 근데 친구들은 반대로 제 태도에 실망을 했더라구요.” 후회하는 만큼 강 씨는 출소 후 조금 달라졌다. 이제 그는 타인에게 어려움을 말하고, 필요할 땐 도움도 요청하곤 한다. 그의 친구는 출소 후 지낼 거처를 제공했고, 친구 부모님은 강 씨가 주민등록을 할 수 있도록 주소지를 제공했다. 강 씨는 ‘전태일과친구들’ 관계자와 함께 공공기관을 찾아 긴급생활지원금도 신청했다. 대구 수성구청은 강 씨에게 임시 거주지를 제공했고, 9월 현재 그는 그곳에 거주하고 있다. 곧 청년임대주택에 입주할 예정이다. 강 씨는 외부에 도움을 청하는 건 이기적이고 나약한 태도가 아닌 시민의 권리라는 걸 배우고 있다. 교도소에서 편지로 소통할 때, 강 씨가 가장 자주 언급한 건 “아무도 없는 불 꺼진 집”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즈음에 엄마와 헤어졌다. 일터에 나간 아버지는 늘 밤늦게 귀가했다. 캄캄한 유년의 빈집은 그의 내면에 트라우마로 남은 듯했다. 아버지가 쓰러진 후에도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것 역시 빈집이었다. “사람들은 아버지 대소변 치우는 게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는데, 그건 별 고통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아버지가 병원에 있던 4개월간 혼자 집에서 지낼 때 정말 막막하고 힘들었거든요. 아버지가 퇴원해 집에 돌아온 4월 23일, 저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어요. 아, 이제 혼자가 아니구나… 아버지가 옆에 있구나….” 그 안도감은 또 다른 비극의 시발점이었다. 사실 강 씨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도시가스가 끊긴 집에선 끼니 해결도 어려웠다. 돈을 벌어야 했다. 당혹스런 일은 아버지 퇴원 바로 다음 날인 4월 24일 밤부터 벌어졌다. “편의점에서 밤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거든요. 온몸이 마비된 아버지를 어두운 집에 홀로 두고 일하러 가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혼자 있으면 아버지도 나처럼 막막할 텐데, 혼자 있다가 돌아가시면 어쩌나… 별 걱정이 다 들고 너무 불안했죠.” 이미 깊은 우울증을 앓던 그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일주일 뒤인 5월 1일 강 씨는 편의점 사장에게 해고 통보를 받았다. 강 씨는 “그날의 해고가 결정타였다”고 회고했다. “굉장히 우울하고, 무기력할 때였거든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알바를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일을 제대로 못하고, 그러다 해고당하고…. 제대로 되는 일도 없고, 나아질 희망도 없고, 노력을 한다고 내일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다 엉망이었죠. 편의점에서 해고당한 날 모든 게 끝장났구나 싶었어요. 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도 컸구요.” 바로 그날부터 강 씨는 아버지가 누워 있는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일주일 뒤 아버지는 시신으로 발견됐다. 재판부는 강 씨의 방치를 고의에 의한 존속살인으로 판단했다. 약 3년 4개월이 지난 지금, 에둘러 가지 않고 강 씨에게 물었다. “재판부 판결대로, 아버지를 본인이 죽였다고 생각합니까?” 강 씨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하늘을 한 번 보고, 땅도 잠시 바라봤다. 작은 한숨도 뱉었다. “그게… (잠시 침묵) 제가 그런 거죠. 제가 아버지를 죽인 거죠.” 뜻밖이었다. 강 씨는 재판 과정에서 유기치사를 주장했었다. 근데 이제 와서 왜? “제가 아버지 누워 있는 방에 안 들어갔으니까요.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고…. 아버지를 죽일 목적으로 안 들어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안 들어가서 돌아가신 건 맞으니까….” 뭔가 애매한 말이었다. 강 씨의 이런 태도는 처음이 아니다. 사건이 벌어진 그때부터 모든 게 그랬다. 판결문에도 당시 상황이 담겼다. “피고인(강도영)이 피해자(아버지)의 사망을 의욕하고 적극적인 행위로서 사망의 결과를 발생시켰다고 보기는 어렵고, 피고인은 피해자를 사망하도록 놔두어야겠다고 결심한 이후로도 피해자가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호소하면 물과 영양식을 호스에 주입하는 등 포기와 연민의 심정이 공존하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대구지법 제11형사부 판결, 2021고합248) 여전히 그때의 심정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듯했다. 내가 따지듯 물었다. “그때 도영 씨가 안방에 들어갔으면 아버지가 생존했을 거 같아요?” “(한참 동안 침묵) 확답하긴 어렵네요. 아버지는 제 방치가 아니라 뇌출혈 합병증으로 돌아가셨을 수도 있긴 하죠. 퇴원할 때 의사도 ‘언제든 사망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요. 사망 원인은 누구도 알 수 없죠.” 부검 결과 아버지의 사인은 ‘영양실조에 따른 폐렴’이었다. 언뜻 강 씨의 방치에 따른 결과로 보이지만, 아버지는 병원에 있을 때부터 영양실조였다. 입원 당시에도 생명이 위중한 응급상황이 벌어졌다. 아버지의 사인과 사망 시점을 엄밀히 따져야 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쟁점이 되지 않았다. 과학적으로 판정하기 어려운 내면의 풍경, 즉 ‘강 씨가 아버지의 죽음을 의도했는지’ 여부만 쟁점이었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누구도 사인을 정확히 모르는데, 강도영 씨만 처벌받았잖아요! 그게 억울할 수도….” 강 씨가 내 말을 끊었다. “억울하지 않아요. 정말로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확실한 건 아니잖아요. 결국 확실한 사실로 남은 건, 제가 책임을 안 졌다는 거잖아요.” 세상에서 잊히고 싶다고 말하던 때처럼 강 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도의적인 책임에서 비롯된 감정일까? “누구를 탓하고 원망한다고 해서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결과가 달라질 일도 없잖아요. 그냥 제가 책임을 못 졌으니까… 아픈 아버지는 제 책임이었으니까요. 제가 방에 들어가지 않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고.” 강 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에게 벌어진 일을 “무슨 말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어떤 말을 해도 세상 사람들은 믿지 못할 것”이란 아쉬움도 밝혔다. 교도소에서 그때의 사건을 수없이 곱씹어 봐도 답을 딱히 내릴 수도 없었다. 생각할수록 마음만 괴로웠다. 결국 그는 “모든 건 내 책임”이라고 스스로 정리했다. 스물한 살 때 겪은 그 엄청난 일을 자기의 언어로 정리해서 설명하려면 아직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한 듯했다. “구치소, 교도소 감방 동료들에게 왜 구속됐는지 설명해야 하는 시간이 있었거든요. 있는 그대로 다 이야길 했는데, 다들 ‘고생했다’는 말을 해주더라구요. 감방에 와서야 위로의 말을 처음 들어봤는데, 기분이 디게 묘하더라구요.” 셜록 보도 직후, 강 씨의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에 시민 약 6000명이 서명했다. 당시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강 씨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고, 김부겸 당시 국무총리가 복지 사각지대에 대해 사과했다. 강 씨는 역시 큰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감방에서 TV 뉴스를 보는데, 제 이야기가 나오니까 얼떨떨 하면서도 힘을 얻는 계기가 됐죠. 모두가 나를 비난하고 나쁘게 볼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했구요.” 강 씨에게 “다시 아버지가 쓰러진 스물한 살 그때로 돌아가면 어떻게 할 것 같느냐”는 다소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 수없이 생각했는지 막힘 없이 답이 나왔다. “아버지와 제가 같은 처지로 돌아간다면, 아버지를 퇴원시키지 않고 제가 멀리 도망갈 거 같아요. 그러면 아버지는 계속 치료를 받을 수 있잖아요. 최소한 아버지는 살해 피해자, 저는 살인자는 되지는 않겠죠.” 아픈 부모를 병원에 두고 연락 끊어버리기. 벼랑 끝으로 몰린 가난한 누군가에겐 최악의 수가 곧 최선의 선택이란 걸, 강 씨는 교도소에서 배웠다. 그가 홀로 아버지를 돌볼 때 도움의 손을 내밀거나, 연락을 끊어버리라는, 최악이면서 최선인 길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강 씨는 학업을 이어갈 길을 모색하고 있다. 강 씨의 꿈은 힙합 뮤지션이다. 그는 구속 전부터 작사·작곡을 했다. 기존에 다니던 대학의 전공은 음악과 거리가 멀었다. 다시 수능을 보는 것까지 포함해, 모든 가능성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 알바 등 일자리도 알아보는 중이다. 그는 자립의 중요성을 구속 기간 내내 생각했다. 가족이 없는 그는 스스로 생계를 꾸리고 공부도 해야 한다. 버거운 길을 앞둔 그에게 다시 물었다. “돕겠다는 사람이 많은데, 왜 다 거부하고 세상에서 잊히고 싶다는 겁니까?” 그가 말했다. “계속 간병살인 청년으로 불리면서 과거에 묶이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제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잖아요. 좋은 일도 아니고, 제가 잘한 것도 없잖아요. 좋은 음악인으로 성공해서 유명해지고 싶어요.” 인터뷰는 그가 살던 집 근처에서 끝났다. 우리는 어느 허름한 치킨집 앞에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큰길 쪽으로, 강 씨는 그의 옛집 골목 쪽으로 향했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 뒤를 돌아봤다. 당장 재개발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누추한 동네의 골목길에서 강 씨 뒷모습만 유난히 알록달록하게 보였다. 카카오택시는 금방 도착했다. 서울행 KTX를 타러 동대구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 더는 강 씨를 간병살인 청년이라 부르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나에게 한 당부이기도 했다. 래퍼 강도영이 어떤 곡을 들고 세상으로 나올지 천천히 기다리기로 했다.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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