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무지개도 비가 그쳐야 뜬다🌈
폴라리스 항해도 vol. 120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오늘은 캐릭터 이야기로 레터를 열어볼게요. 혹시 ‘감자도리’를 기억하시나요? "도리도리도리도리 감자도리 / 빨간 망토 작은 눈에 감자도리 / 고구마가 되고 싶어 꿈을 꾼다 / 모험을 떠난다!" 멜로디를 흥얼거리셨다면 반갑습니다. 저와 동년배이실 것 같네요.
감자도리는 고구마가 되고 싶은 감자예요. 자라면서 자신이 주변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지죠. 가족, 친구, 선생님, 심지어 마트 종업원까지 모두 고구마인 세상에서 자신만 감자라는 사실은 그를 외롭게 합니다. 그래서 감자도리는 고구마가 되기 위해 모험을 떠나요.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한 갈망,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비유적으로 표현해 지금도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야기이죠.
한국에도 정체성을 이유로 소외를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퀴어는 한국 주류 사회로부터 마치 감자도리처럼 여겨져요. 이성애, 성별 일치감이 당연한 세상에서 성적 지향, 성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립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퀴어의 분투가 점차 사회적 목소리로 확산하면서 긍정적인 변화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최근 한국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 퀴어 의제를 다뤄보겠습니다. <동성부부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대법원판결>,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된 교실>, <2024년 미디어 콘텐츠 속 퀴어>를 순서대로 따라갑니다. 마지막으로는 ‘사회적 합의’라는 말로 퀴어를 미루는 정치를 어떻게 바꿀지 고민해 볼게요. 감자로 태어난 사람이 고구마가 되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면서요. 질문으로 꽉 찬 레터를 보낼 때면 독자님 의견이 더욱 궁금해집니다. 댓글과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
-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中 -
#1 법정에서 삶과 관계를 ‘증명’해야 하는 퀴어
끝이 보이지 않는 폭염을 뚫고 비가 온 7월 어느 날, “사랑이 또 이겼습니다.” 동성부부의 사회보장제도상 권리를 인정한 첫 대법원판결이었습니다.
2019년, 동성부부이자 실질적 혼인 관계인 소성욱 씨와 김용민 씨는 “인정이 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건강보험 직장 가입자인 김용민 씨는 소성욱 씨를 피부양자로 등록했습니다. 공단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관계 배우자에 대해서도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얼마 지나고 등록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담당 건강보험공단 직원은 ‘착오 처리’였다고 설명하며 소성욱 씨의 피부양자 자격을 상실시켰습니다.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착오’가 만든 8개월간의 피부양자 자격은 없는 셈이 됐습니다. 담당 직원은 소성욱 씨가 건강보험 지역가입자였음을 전제로 8개월분의 건강보험료 등 합계 115,560원을 납입할 것을 고지했습니다.
소성욱 씨는 위 처분에 2021년 2월 행정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소 씨의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2심 재판부는 "사실혼 배우자 집단과 동성 결합 상대방 집단은 이성인지 동성인지만 달리할 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결과는 원고 승소였습니다. 그러나 공단의 상고로 판단은 다시 대법원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올해 7월 18일, 대법원장은 “동성 동반자를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평등원칙에 위배된다”고 말하며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했습니다.
*국민건강보험제도: 보험가입자가 납부하는 보험료와 국고 지원을 재원으로 하여, 국민에게 발생하는 질병ᆞ부상 등 사회적 위험을 보험의 방식으로 대처함으로써 국민의 건강과 소득을 보장하는 사회보험제도로서 국가가 헌법상 국민의 보건에 관한 보호의무를 실현하기 위하여 마련한 사회보장의 일환이다. 이는 국가공동체가 구성원인 국민에게 제공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에 해당한다.
*피부양자제도: 건강보험제도의 취지에 따른 것으로서 직장가입자에게 주로 생계를 의존하는 사람이 경제적 능력이 없어 스스로 보험료를 납부할 수 없더라도 직장가입자가 납부한 보험료에 기반하여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사회보장제도이다.
이번 대법원판결이 중요한 이유는 명시적으로 성소수자의 존재와 권리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대법원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사실상 혼인 관계의 집단과 동성 동반자 집단을 달리 취급한 점을 지적했습니다. 즉, 이번 판결은 공단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자의적으로 다르게 취급한 것을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이라고 보았고, 이는 헌법상 평등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 했습니다. 사실 국민건강보험의 피부양자 자격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유동적으로 조정되어 왔는데요. 이번 판결은 동성 동반자의 사실혼을 인정하고 실질적 평등을 보장하는 선례를 남겼습니다. 아래는 판결문 발췌입니다.
“동성 동반자를 직장가입자와 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피부양자에서 배제하는 것은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로, 그가 지역가입자로서 입게 되는 보험료 납부로 인한 경제적인 불이익을 차치하고서라도, 함께 생활하고 서로 부양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전통적인 가족법제가 아닌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인 건강보험의 피부양자 제도에서조차도 인정받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자유, 법 앞에 평등할 권리를 침해하는 차별행위이고, 그 침해의 정도도 중하다.”
박한희 공익변호사는 위 판결문의 구절이 문제의 본질을 짚어낸다고 설명합니다. 즉, 대법원은 피부양자 자격 불인정이 경제적 손실을 넘어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침해’라고 판결했기 때문이죠. 애당초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소성욱 씨가 월 소액을 부담하면 지역가입자로서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굳이 소송함으로써 얻을 이득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존재를 부정당했던 동성부부에게 실질적, 금전적 손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법적 잣대로 자신들의 삶이 지워지고 재단당하는 경험, 즉 ‘존재가치의 침해’가 이들 부부에게 더 큰 손실이었습니다.
다만, 이번 대법원의 결정에 기뻐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판결의 보충의견은 법원이 “미래의 일을 앞당겨 현재의 법으로 선언할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확실히 말합니다. 입법부의 역할이 도드라지는 대목입니다. 대법관들은 “후속 판결과 입법을 통하여 동성 동반자들의 법적 지위에 대하여 더욱 포괄적이고 명확한 법리나 제도가 축적되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어지는 글들은 정치권과 사회의 역할을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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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금은 먹고사는 문제가 먼저’라고요?
퀴어 문제보다 먹고사는 문제가 급선무라 했던가요? 누군가에겐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퀴어 청소년의 경우 더욱 위태로운 생사의 비탈길에 서 있습니다. 청소년 퀴어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미디어에서 흔히 묘사하듯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퀴어를 부정하는 학교와 가정의 반응 때문이죠. 청소년성소수자지원센터 띵동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성소수자로 정체화하는 과정에서 걱정한 이유로 '가족, 친구의 부정적 반응'을 꼽은 응답자 비율이 평균 80%를 차지하고 있어요.
아래 링크를 통해 볼 수 있는 대구MBC의 ‘들어보니’는 기댈 곳 없는 청소년 퀴어의 현실을 낱낱이 드러냈습니다. 우선 성 정체성에 관련된 고민을 교사에게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환경입니다. 교사를 대상으로 한 퀴어 관련 교육이 부족하다 보니, 퀴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교사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학교 밖 청소년 상담 기관도 좋은 선택지가 못 됩니다. 실제로 상담 기관을 이용해 본 청소년 퀴어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나 보호자에게 연락해서 다시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올해 4월 폐지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는 학교의 퀴어들을 위한 최소한의 버팀목이었습니다.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차별금지 사유로 명시했으니까요. 학생인권조례마저 사라진 학교에서 청소년 퀴어의 존재는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학생인권조례는 특정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장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주류적 경향과 다른 성적지향을 가진 개인, 그리고 생물학적 성별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학생인권조례는 이들 또한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의 동등한 주체라는 점을 인정하고, 차별하지 않도록 교육하려는 것입니다. 학생인권조례가 맨 처음 시행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학생인권조례를 시행한 지역에서 동성애자를 포함한 성소수자의 숫자가 급증했다는 자료가 있지도 않습니다.
- 학생인권조례, 오해 넘어 이해로, 국가인권위원회(2023)
존재의 부정은 제도권이 보장하는 사회 안전망 밖으로 내몰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청소년 퀴어는 자살 위험군이지만, 이들만을 위한 국가의 자살 예방 대책은 전무합니다. 성장한 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2019년 7월 도입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는 성소수자 괴롭힘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실태조사입니다. 국가 차원에서 실시한 실태 조사가 전무한 탓에 퀴어가 얼마나 있는지, 퀴어가 겪는 차별은 무엇이며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논의를 시작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거든요.
퀴어가 없는 존재가 되는 건 현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가상의 세상을 그리는 미디어에서도 퀴어의 존재는 부정당하곤 합니다. 다음 글에서 이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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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원작 속 퀴어 캐릭터, 드라마에선 사라졌다고?
대중문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 했던가요.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정년이>와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퀴어가 지워지거나, 납작하게 재현됐습니다. 두 작품 원작은 모두 작중 캐릭터의 퀴어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워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죠. 웹툰 <정년이>는 여성 국극단 속 여성들의 경쟁, 연대, 사랑을 다뤘는데요. 드라마로 각색되면서 주인공 정년이와 연인 관계였던 캐릭터 ‘부용’이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박상영 작가의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속 인물 ‘흥수’는 게이지만, 영화 예고편에서는 마치 여자 주인공의 연인처럼 비쳤고요. 이처럼 퀴어 서사는 상업성과 맞물리며 종종 삭제되거나 감춰지곤 합니다.
‘도둑맞은 퀴어’라는 칼럼에서 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퀴어베이팅’이라는 용어만큼이나 퀴어 서사를 이성애 서사, 혹은 퀴어가 등장하는지 알 수 없는 서사로 둔갑시키는 행태를 지적할 만한 ‘헤테로(heterosexual, 이성애)베이팅’ 같은 용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이죠. 먼저 ‘퀴어베이팅(Queer-baiting)’이라는 용어에서 ‘베이팅(baiting)’은 미끼를 의미합니다. 본편에 퀴어 서사가 등장할 것처럼 편집한 예고편은 퀴어베이팅의 대표적인 예시예요. 퀴어 팬덤의 구매력을 노리고 퀴어 친화적으로 편집한 예고편을 공개한 다음, 정작 본편에서는 예고편과 다른 서사를 보여주는 미디어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 ‘퀴어베이팅’이라는 용어가 생겼습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 소설의 폭발적 증가, 퀴어 문학 팬을 만든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영화로 각색되면서 인물의 정체성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왜 캐릭터의 게이 정체성이 예고편에는 나올 수 없었는지 질문이 남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퀴어 서사는 단순히 삭제되는 것을 넘어 노골적인 혐오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곧 공개될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은 교회 단체로부터 ‘동성애 미화를 중단하라’는 반대에 부딪혔죠. 이에 박상영 작가는 “혐오의 민낯은 겪어도 겪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결국 사랑이 이긴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한편 퀴어 콘텐츠가 양적으로 많아졌고, 법적 권리를 위한 투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대의 목소리가 거세지는 건 그만큼 퀴어 이슈가 중요한 사회적 갈등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퀴어 의제의 ‘속도’와 ‘방향’을 고민하며 변화를 만들어 나갈 때가 아닐까요? 대중문화에서는 퀴어가 그저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소비되는 것을 넘어 누군가의 일상임을 인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콘텐츠 제작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논문이 있습니다. <한국 성소수자들의 넷플릭스 퀴어 콘텐츠 수용에 관한 탐색적 연구>입니다. 하단 링크를 클릭하시면 해당 논물을 정리한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논문에서 37명의 성소수자에게 앞으로 보고 싶은 콘텐츠를 물었더니, 많은 이들이 ‘한국판 논스톱’ 같은 시트콤을 꼽았습니다. 그동안 퀴어는 주로 특수한 사랑이나 비일상적인 존재로만 재현되어 왔습니다. 가족들과 사소한 일로 다투고, 서로의 끔찍하고 귀여운 면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시트콤 속 인물들의 일상성은 지금껏 주류 미디어가 담아내지 않는 것이었죠.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퀴어들도 이미 사회 구성원으로서 일하고, 밥을 먹으며, 평범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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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퀴어에게 뒤로 가라는 정치, 이제는 뒤안길로
세상에서 가장 퀴어 프렌들리한 것은? 정답, 번호표 기계. 밀릴 일 없이 순번 정확하니까. 퀴어 인권에는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란 말이 지겹도록 따라붙습니다. 최근에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당대표의 입을 통해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이 더 급선무’라고 변주되기도 했습니다.
정치는 퀴어가 궁극적으로 차별받는 무대입니다. 번번이 다수 집단에 밀려 동등한 권리를 얻을 기회가 지연되곤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18년째 국회를 체류 중인 차별금지법이죠. 주된 원인은 종교계의 영향력이 꼽힙니다. 특히 많은 인구와 조직적인 행동력으로 한국 정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독교는 대대적으로 성소수자 차별을 주창합니다. 정치인들이 성소수자에 연대하다 이들의 항의를 받거나, 주요 선거를 앞두고 표를 의식해 돌연 입장을 철회하는 사건은 비일비재합니다.
명확히 퀴어의 편에 서는 정치인이 부재하다 보니, 극우·보수뿐만 아니라 진보 진영에서도 퀴어들은 배제됩니다. 퀴어 의제보다 우선해야 할 의제가 있다며 퀴어혐오 발언을 한 후보자나 정당에 눈물을 머금고 투표하도록 압박합니다. 선거 패배를 대의보다 개인을 우선한 퀴어들의 이기심으로 탓하는 경우들도 있죠.
퀴어를 차별하는 정치, 그 원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힐 때도 된 것 같습니다. 정치철학자 박이대승 씨는 퀴어 차별의 원인을 종교계의 혐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절대다수의 무관심’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자신이 감각하지 못하는 타인의 구조적 차별과 폭력에 무관심하고, 구조적 개선을 외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는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이기도 합니다.
시민을 길러내는 가장 기초 현장인 교육계부터 돌아봅시다. 최근 서울을 포함해 여러 지자체 학생인권조례가 잘못된 성 인식을 주입한다는 이유로 폐지되었습니다. 교육청에서 페미니즘, 성교육 등 다양성 도서를 유해 도서로 지정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조전혁 보수 진영 교육감 후보는 ‘페미니즘과 동성애 교육을 폐지할 것’이며, 교원의 사상을 검열할 것임을 공약으로 내놓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종교계, 정치인, 시민 모두가 퀴어에게 새치기를 했습니다. 결여된 민주 의식으로 성소수자의 권리를 뒤로했습니다. 그 결과는 성에 대한 그릇된 교육, 규정, 자유 탄압의 메시지가 사회를 잠식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비단 성소수자에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 여성, 노동자 등 다른 소수자들의 운동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연대 대신 혐오와 소수의견 취급이 만연합니다.
퀴어 문제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차별에 동조했던 스스로와 사회를 돌아보고, 평등을 위한 행보에 함께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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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가 남긴 편지
이번 레터를 준비하며 동성부부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판결문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 중 개인적으로 가장 와닿았던 부분을 공유합니다.
“국가가 운영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인 건강보험제도의 보호에서조차 공식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사회와 국가의 공인된 보호를 받을 존재가치를 부정 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퀴어는 “‘숨겨진 나’와 ‘드러내는 나’가 따로 존재하는 분열의 상태에서 불안한 삶을 강요당할 수 있다.”
저에게도 ‘숨겨진 나’와 ‘드러내는 나’ 따로 존재하는 순간들이 있는데요. 이 ‘간극’을 떠올리니 1년 중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는 날은 과연 몇 일이나 될지 궁금해졌습니다.
손에 꼽는 ‘나다울 수 있는 날’을 묘사하면 이런 순간들이 아닐까요. 을지로 일대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행진하던 날, 울면서 춤추며 애도하던 날, 친구와 스탠딩코미디쇼를 관람하며 웃은 날, 바바라 해머 감독의 영화 속 관객의 모습에서 나를 본 날,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바다를 본 날.
위처럼 '예외적인 시간'과 사회와 불화하는 일상을 살다보면 모순적인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행정, 제도적 인정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가령 판결문의 내용처럼 '숨겨진 나'가 제도적인 현실때문에 미래의 배우자를 부양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래전부터 국가는 돌봄과 부양의 책임을 가족이라는 경제공동체에 맡겨왔고 '숨겨진 나'는 그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는데, '드러내는 나'로 살면 최소 나라는 존재와 내가 맺는 관계를 국가에게 소명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이렇게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 분노하길 반복하면, 퀴어를 비롯한 ‘국회 정치’에서 밀려난 다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최근엔 전국장애인부모연대가 매주 화요일 국회 앞에서 사랑하는 자식이 “평등히 살길” 바라며 권리중심 지원체계를 요구하는 시위를 자주 봅니다.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돌봄과 가족의 형태를 만들어야 하나' 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고 생각합니다.
먹고, 자고, 쉬고, 친밀함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일상은 삶의 가장 필수적인 부분일테지요. 돌봄/부양 체계가 더 다양한 가족과 관계의 형태를 포함하길, 그리고 돌봄의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되는 것 뿐만 아니라, 모두가 사회 제도적 돌봄을 차별없이 누릴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레터를 마칩니다.
2024.10.21
에디터 산호🐠 드림
만든 사람들: 해안🌊, 모래🏖️, 푸릇🌿, 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