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경제] 꽁꽁 얼어붙은 세계 위를 반도체가 걸어다닙니다
요즘 테크, 경제 부문에서 반도체만큼 주목받는 주제가 있을까요? 또 제대로 논해보자면 반도체만큼 국제, 외교, 과학기술, 국내 산업 동향과 정책까지 모든 분야를 파고들어야 하는 주제도 없죠. 그래서 폴라리스가 눈이 번쩍번쩍해지는 광활한 반도체의 바다에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엔비디아가 연 3세대 시장의 주요 반도체와 기업 핵심 요약 정리, 레이스 너머의 패권 전쟁, ‘반도체 강국’이라는 대한민국의 상황까지. 이상 탐사 정보 브리핑이었습니다. 그럼 모두 준비 되셨나요? 3, 2, 1. 반도체로 딥다이브! "기술은 경쟁의 주도권을 결정하고, 혁신은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칩워>, 크리스 밀러 #1 엔비디아, 왜 난리래? 요새 여기저기서 ‘엔비디아’란 이름 많이 들어보지 않으셨나요? 엔비디아가 장안의 화제인 이유는 이 기업의 주가가 4개월 만에 두 배 가량 뛰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AI 반도체가 있었죠. 현재 엔비디아는 전 세계 AI 반도체 시장의 90% 이상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어요. AI와 반도체, 그리고 AI 반도체는 무엇이고 어떤 관계일까요? AI는 인간의 학습능력과 추론능력을 컴퓨터 과학으로 구현한 기술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2020년대 이후 발전한 생성형AI는 딥러닝으로 빅 데이터를 학습해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인공지능을 뜻합니다. 비비의 밤양갱을 아이유가 부른 것처럼 만든다던가, 프롬프트에 명령을 입력하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등 현재 생성형AI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죠. 생성형AI 산업은 반도체 없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생성형AI가 학습할 빅 데이터를 저장하고, 비메모리 반도체는 생성형AI를 구현하기 위한 초고속 계산을 하기 때문이에요. 메모리 반도체는 저장 기능을 수행하는 반도체입니다. 한국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강한 분야죠. 비메모리 반도체는 명령을 실행하는 반도체입니다. 비메모리 반도체의 제작 단계는 설계(팹리스)와 생산(파운드리), 검수(디자인하우스)로 나뉘어 있어요. 이중 우리가 AI반도체라고 부르는 것은 비메모리 반도체에 속합니다. 비메모리 반도체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요? AI 반도체는 아직 딱 정의되진 않았습니다. AI에 사용하는 반도체 모두(CPU, GPU, NPU)를 AI 반도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AI 맞춤형으로 제작된 반도체만(NPU) AI 반도체라고 하는 사람이 있죠. 엔비디아는 이중 현재 AI 데이터 센터 구축에 필요한 핵심적인 반도체인 ‘GPU’를 만듭니다. 이 GPU, 다른 기업도 만들 수 있지 않나요? 왜 엔비디아가 시장을 독점하고 있을까요? 엔비디아가 현재 AI 반도체 시장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이유는 ‘쿠다(CUDA, Compute Unified Device Architecture)’라는 소프트웨어 덕분입니다. ‘쿠다’는 엔비디아에서 무료로 배포한 AI 개발 플랫폼이예요. 약 10년 동안 ‘쿠다’를 기반으로 전 세계 AI 개발 생태계가 형성되었는데, 이 ‘쿠다’는 엔비디아의 GPU에서만 작동합니다. 이미 전 세계의 많은 개발자들이 이 ‘쿠다’라는 플랫폼에 익숙한 나머지 다른 GPU를 사용하기가 힘든 환경이 형성되었다고 해요. 생성형AI를 개발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하나에 5천만 원까지 호가하는 엔비디아의 GPU를 울며 겨자먹기로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이에 여러 기업들이 엔비디아의 독점 체제를 깨겠다고 나섰습니다. 인텔은 엔비디아의 AI 반도체인 ‘H100’의 대항마로 ‘가우디3’를 내놨습니다. 앞으로 반도체를 둘러싼 세계 시장은 어떻게 변할까요? 전 세계 반도체 역사와 이를 둘러싼 쟁점을 담은 책 <칩워>의 저자 크리스 밀러 미 터프츠대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면 감이 잡히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보러가기 #2 두 세계 이야기: TSMC와 삼성전자 엔비디아 주가가 4월 말인 지금은 고점에서 살짝 떨어졌죠. 하락장이 본격 시작한 날은 대만에서 25년 만에 가장 강한 지진이 났던 지난 4일이었습니다. 지진 때문에 TSMC가 공장 가동을 멈췄거든요. 지난 글에서 잠깐 언급됐던 TSMC, 대체 얼마나 중요한 기업이기에 그럴까요? TSMC는 여러 업체에서 설계한 비메모리 반도체를 대신 맡아서 생산해 주는 기업입니다. 엔비디아에서 설계(즉, 팹리스)한 AI 반도체를 대신 생산(파운드리)해주는 곳도 TSMC입니다. 비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 TSMC가 갖춘 영향력은 상당히 센데요, 팹리스-파운드리 구조를 만든 기업이 TSMC거든요. 1980년대 말 탄생해 시장을 개척하며 ‘고객사에 도전하지 않는다’는 전략과 우수한 기술력으로 전 세계에서 고객을 모았죠. 그 결과 전체 파운드리 시장에서 약 60%를 차지하는 기업이 됐습니다. 엔비디아가 AI 개발 플랫폼을 독점하면서 AI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 것처럼, TSMC도 비메모리 반도체 생산을 반쯤 독점하면서 무시할 수 없는 기업이 된 거예요. 지진으로 TSMC 공장이 멈췄다는 소식에 엔비디아 주가가 요동친 건 지극히 당연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물량이 막혀 장사를 못 할지도 몰랐으니까요. 재밌게도 창업자 모리스 창은 창업한 뒤에도 몇 년간 지금 본업과 다른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고려했다고 해요. 한 기업에서 초청받아 공장을 방문한 뒤, 그는 생각을 접고 파운드리 사업에만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전자입니다. 삼성전자는 당시 세계 1위였던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상당히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갓 시장에 뛰어든 TSMC가 따라잡기 어려웠습니다. 삼성전자는 기어이 세계 1위를 차지했고, SK하이닉스도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한국은 반도체 강국이 됐습니다. 그런데 메모리 반도체의 위상이 예년만 못합니다. 비메모리 반도체가 AI와 함께 반도체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코로나19로 활황을 맞았던 전자기기 시장이 가라앉는 과정에서 큰 손실을 봤거든요. 활황을 맞아 메모리를 많이 생산해 뒀는데, 시장이 가라앉으면서 재고를 떠안은 겁니다. 두 기업이 믿는 구석은 HBM, 고대역폭메모리라는 제품입니다. 원래 램 한 개가 들어갈 자리에 램을 몇 개씩 쌓아 올려서 성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제품입니다. 많은 정보를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AI 반도체에 필요합니다. HBM을 아주 잘 만드는 회사가 두 기업입니다. SK하이닉스는 HBM이란 개념을 창조한 회사고요, 엔비디아에 납품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엔 TSMC와 협력하기로 했어요. 삼성전자는 그런 SK하이닉스보다 HBM 기술 경쟁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고요. 그렇지만 지금은 메모리 반도체만으로 미래를 그리기에 부족한 시대입니다. 비메모리와 파운드리에서 무언가 보여줘야만 해요. 다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외교입니다. 자, 잠시 세계를 무대로 한 권투 링으로 가볼까요? 깊이 읽어볼 기사로는 지난 2021년 매일경제에서 발행한 TSMC 관련 기사를 준비했습니다.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잘 설명해 읽을 만해요. 🧭글 보러가기 #4 한국은 어떡하나  이 밥그릇 싸움에서 한국은 과연 제 몫을 지킬 수 있을까요? 대외적으로 한국의 위치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효자 특산물’인 메모리 반도체의 입지는 좁아졌거든요. 전문가들도 지난 2년 새 메모리 중심인 국내 산업구조의 약점이 확연히 드러났다고 평가하고요. 설상가상 믿었던 메모리 반도체의 수출액은 5년 사이 반토막이 났고, 현재 고공성장하는 비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한국은 3.3%의 낮은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어요. ‘아니 그럼 기업은 뭐하고 있지?’ 의문이 드실텐데요. 기업들도 반도체 전선에 갇혀 엔비디아 독주를 용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쿠다 대항마 만들기, 자립 첨단 반도체 만들기, 틈새 국가로 진출해 독점적 지위 확보하기. 다양한 방법으로 저마다 경쟁력을 높이고 있죠. 그중 쟁점은 비메모리 분야, 특히 빅테크와 같은 대형 고객사의 수주를 따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성능이 좋은 상품을 내놓고, 첨단 공정기술을 탑재해야 할 테지요.  ‘반도체 산업 터줏대감’인 삼성전자도 비장의 무기를 준비중입니다. 최첨단 기술 개발에 집중하는 모습인데요. 차세대 반도체 핵심 기술인 *GAA 공정(Gates All Around)을 3나노 반도체부터 먼저 적용하며 2나노 반도체부터 GAA 공정을 적용하는 TSMC를 견제했습니다. 수율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목표죠. 또한,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대표적인 AI 메모리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선두권을 두고 경쟁중이고요.  (*GAA 공정 = 말 그대로 ‘모든 면에서’ 전류가 흐르는 구조인데요. 데이터 처리 속도와 전력 효율을 높일 수 있습니다.)  주요 나라와 산업이 앞다투어 뛰어드는 형국, 정부의 지원이 필요해보이는 대목입니다. 이미 미국은 반도체법을 통해 ‘자급자족’ 첨단 반도체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고, 이에 삼성전자도 파운드리 팹 조성을 조건으로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 9조 원을 받기도 했죠. 미국의 큰손, 대형 고객의 수주를 딸 수 있을지 혹은 남의 나라 좋은 일만 해주게 될지는 두고 봐야겠습니다. 한국도 나름 기업 지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요. 정부는 최근 한국형 칩스법, 이른바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경기 남부에 조성해 ‘메모리 파운드리’ 생산 중심지를 2040년까지 만들겠다 발표했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622조원을 투자하고, 정부는 세제 혜택과 전력, 용수 등 인프라 구축, 인력 양성 등을 지원한다는 계획입니다. 더불어, 반도체 투자세액공제를 25%까지 확대하고 올해 반도체 지원 예산을 지난해보다 2배 이상 늘렸습니다. 일각에서는 이와 같은 국가적 지원이 재벌 특혜, 부자 감세라고 비판하는 반면, 안보 경제가 달린 문제인 만큼 필연적이라는 의견도 있고요. 전문가의 빅픽쳐는 조금 다릅니다. 기업에만 의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연구·개발(R&D) 지원이라는 입장이죠. 예컨대, 기업들의 R&D 자금이나 시설 투자에 인센티브를 늘리면 그 자금이 기업에만 머무르지 않고 대학과 연구기관까지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인데요. 다만, 반도체 관련 R&D 예산 삭감의 여파로 성장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실제로 내년 정부 예산은 지난해 대비 크게 축소됐는데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연구 부문은 26% 감소율을 기록, 중소/중견 팹리스기업을 육성, 지원하는 예산 역시 200억원이나 감소했습니다. 쉽지 않은 싸움. 한국 반도체 산업이 마주한 단기, 장기간 과제를 뚫을 돌파구가 요원해보입니다. 🧭글 보러가기 에디터가 남긴 편지  이번 레터를 준비하며 <칩워>를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흥미로웠던 부분을 소개하자면 저자인 크리스 밀러가 현대 역사의 분기점이 된 군사력을 제2차 세계대전의 강철과 알루미늄, 냉전 시대 핵무기, 그리고 현재 미·중 패권 싸움의 ‘컴퓨터의 힘’(computing power)이라고 보는 점이었어요. 우리가 매일 끼고 자는 스마트폰부터 저 멀리서 날아가는 미사일까지, 반도체는 우리가 먹고살 거리부터 군사력까지 관여하지 않는 곳이 없더군요. 반도체 산업이 중요하다는 건 이제 알겠습니다. 그런데 레터를 준비하면서 여러 기사를 읽어보고, 책을 읽었을 때 어딘가 찜찜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삼성과 하이닉스와 같은 대기업은 주가, 즉 숫자로만 산업을 평가합니다. 실적을 까고 보니 예상보다 돈을 많이 벌었다, 예상보다 돈을 벌지 못했다는 식으로요. 좀 더 찾아보니, 이 거대하고 굳건해 보이는 산업의 이면에는 황폐하고 허약한 구조가 있었습니다. 먼저 질병 산재 문제입니다. 2007년,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급성 백혈병을 얻은 황유미 씨가 23살에 돌아가셨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 후 반도체 노동자 인권 단체 반올림이 출범했고, 황유미 씨가 사망하고 10여 년이 지나서야 삼성전자는 중재 협약을 통해 반도체 노동자들에게 사과와 보상, 재발 방지를 약속했습니다. 여전히 반도체 노동자들은 일하다 죽고, 일하다 병에 걸려도 사회와 기업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구조는 반도체 산업뿐만이 아니라 첨단산업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다음으로 물 문제입니다. 반도체 공정에는 깨끗한 물이 필요합니다. 반도체 기업이 하루에 사용하는 물의 양은 107만 톤에 달합니다. 첨단산업이 발전하면서 앞으로 반도체 수요는 늘어날 것이고, 이에 따른 물 사용량은 지금의 3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 가뭄과 폭우의 주기가 잦아져 점점 더 물을 저장하기 힘들어집니다. 지역에서는 변기 내릴 물도 없어 밖에서 볼일을 해결하거나 마실 물도 없다는데, 정부와 기업이 계획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인근 팔당댐에서도 물을 공급할 수 없어 강원 화천댐의 물까지 끌어 쓸 계획이라고 합니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을 착취해 반도체 산업을 지속한다면 우리가 얻게 될 것은 무엇일까요? 어마어마한 경제적 수익과 모두가 두려워할 세계 최강의 군사력? 그러나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고 ‘잘 살고 부강한 나라’를 얻는다고 무엇이 달라질까요. 아무도 없는 황량한 도시에서 칩 하나만 덩그러니 살아남는 미래가 되지 않길 바라며 레터를 마칩니다. 에디터 선심🔆 드림 만든 사람들: 선심🔆, 보라 🍇, 푸릇 🌿, 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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