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반도체 공장 취업한 고교생, 1년 만에 간이 녹았다 [열아홉, 간이 녹았다 1화]
크리스마스 캐럴 대신 아우성이 울려 퍼지는 병원 응급실. 그 틈에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된 김선우(가명) 씨가 있었다. 그는 엄마 이하영(가명) 씨에게 몸을 지탱한 채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리고 있었다. “당장 간 이식하지 않으면 아드님 죽을 수도 있어요.” 졸음이 쏟아지는 순간에도 날카로운 의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몸이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건 (2021년) 10월쯤이에요. 그때 부딪힌 적도 없는데 몸에 멍이 들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제 성격이 워낙 덜렁대니까 그냥 어디 부딪혔겠지, 하고 넘어갔죠.” 선우 씨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20년 10월, 반도체 후공정 업체 ‘스태츠칩팩코리아’에 입사했다. 집은 울산, 회사는 인천에 있었다. 그는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화학물질 가득한 작업장. 3교대 근무. 열아홉 고등학생 선우 씨는 그해 모교의 ‘1호’ 취업생이라는 자부심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몸에서 이상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건 입사한 지 1년 만인 2021년 10월. 몸에 멍이 들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으면 메스꺼워 구토가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다. 먹은 음식을 다 토해도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저 교대근무에 누적된 피로 탓이라고 여겼다. 코피를 쏟는 날도 있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지혈이 안 돼 회사 인근 이비인후과에서 코 혈관을 지졌다. 다음 달에도 코피가 쏟아졌다. 공장 안 화장실에 앉아, 반쯤 남은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다 뜯어 썼다. 그래도 코피가 멎지 않았다. 선우 씨를 찾는 파트장의 전화. “코피가 멈추지 않는다”고 대답했지만, 빨리 복귀하라는 말만 돌아왔다. 그렇게 두 시간이나 지났다. 그제야 코피는 간신히 멎었다.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마저 닦아내고 자리로 복귀했다. 잠이 쏟아졌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싶었다. “선우야, 너 얼굴이 좀 누런 것 같다.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니야?” 결혼기념일을 맞아 울산 본가에 온 선우 씨에게 엄마 하영 씨가 말했다. 최근 한 달간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던 선우는 일 때문에 피곤할 뿐이라고 답했다. “엄마의 촉이라는 게 있잖아요. 오랜만에 아들이 집에 와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니까 이상해요. 너무 노래. 근데 선우도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하지, 애 아빠는 둔감하니까 그런 거 잘 모르겠다고 하지…. 그때 같이 병원 가자고 못했던 게 제일 후회돼요.” 몸이 지쳐도 주기적으로 통장에 찍히는 급여를 보면 ‘그래도 할 만한 일’이라고 여겼다. 일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1년이 넘은 스무 살짜리 사회초년생은 요령 없이 버틸 뿐이었다. 한 달이 지난 12월 23일, 교대근무를 하던 동료도 선우 씨를 걱정했다. 황달이 있는 것 같으니 병원을 가보라는 말. 그저 피곤해서 낯빛이 안 좋다고 하기에는 눈자위까지 너무 노랗게 변했다. 밤 10시를 넘긴 시간. 회사 주변에 그 시간에 문을 여는 병원은 없었다. 선우 씨는 두 달째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렸다. 새벽조, 주간조, 야간조 어디에 투입되든 눈뜨는 게 힘겨웠다. 이튿날 오전 병원에 가려 했지만, 늘어진 잠으로 갈 수 없었다. 이튿날 오후 누렇게 뜬 얼굴로 출근했다. 상사는 선우 씨의 안색을 살피더니 병원에 가라고 조퇴를 시켜줬다. 뜻밖의 배려. 평소 같으면 ‘열이 없으면 감기에 걸려도 출근하라’던 상사였다. 선우 씨는 그제야 병원을 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가까운 내과로 향했다. 의사는 황달을 치료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며, 근처에 있는 인하대학교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피 검사를 마친 선우 씨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대학병원은 평일 오후에도 환자들로 북적였다. 순서가 되려면 30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때 간호사가 선우 씨 이름을 불렀다. 앞서 방문한 환자들을 뒤로하고 진료실로 먼저 들어갔다. “당장 입원 안 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바로 입원하세요.” 선우 씨는 그제야 심각성을 느꼈다. 의사는 일반인의 정상 간 수치(ALT)가 40IU/L 이하인데, 선우 씨의 간 수치가 2236U/L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혈소판도 말썽이었다. 당시 선우 씨의 혈소판 수치는 혈액 1㎕(마이크로리터)당 5000개. 정상인들의 혈소판 수치가 1㎕당 15~40만 개 사이인 것을 고려하면 현저히 부족한 수치였다. 코피가 한두 시간씩 멈추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엄마, 나 몸이 안 좋아서 병원 왔는데 당장 입원해야 될 것 같대.”“몸이 안 좋아? 입원해야 되는 거면 여기 내려와서 입원해도 되지 않아?” 전화로 다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은 현실감이 없었고, 졸음이 쏟아지는 것 말곤 통증도 없었다. 간 수치가 정상의 약 56배 이상 나왔다는 것도, 혈소판 수치가 80배 적게 나왔다는 것도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몸이 많이 좋지 않은가 보다 할 뿐이었다. 엄마의 말에 선우 씨는 비행기를 타고 울산 본가로 갔다. “이 몸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울산대학교병원 의사는 혈액검사 결과지를 보고 질겁했다. 간 이식이 필요할 만큼 심각한 수치였다. 의사의 말에 하영 씨는 눈앞이 노래졌다. 그렇다고 당장 입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의사는 “아직 우리 병원은 간 이식을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며, 부산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했다. 하영 씨는 옆에서 눈을 껌뻑이며 졸음을 참는 아들을 차에 태웠다. 한시가 급했다. 하지만 도로는 북새통을 이뤘다.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거의 다 왔어, 선우야. 조금만 버텨. 괜찮지?” 평소 4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 꽉 막힌 도로 위에 두 시간을 넘게 갇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은 아들을 보면 조급해졌다. 초행길, 꽉 막힌 도로, 옆자리에는 쓰러져가는 아들까지. 운전대를 잡은 하영 씨의 손이 덜덜 떨렸다. 혹여나 아들이 눈을 감으면 다시 깨어나지 못할까봐…. 부산에 진입해 가장 가까운 소방서를 찾았다. 하영 씨는 ‘미친듯이’ 뛰어 들어가 소리를 질렀다.  “제발 우리 애 좀 도와주세요!” 엄마의 외침에 구조대원들은 선우 씨를 구급차에 태웠다. 사이렌을 울리니 꽉 막혀 있던 도로에도 숨통이 트였다. 하영 씨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당시는 코로나19 위기대응 수위가 높던 때.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을 찾아가도 대기 환자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잘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휴가를 낸 의사들도 많았다. 하영 씨의 속이 타들어 갔다. 선우 씨는 구급차를 타고 세 번째로 찾아간 병원에서 겨우 병상에 누웠다. 그마저도 치료가 아닌 ‘응급조치’였다. 하영 씨는 서울로 가야 아들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2021년 12월 27일 새벽 6시, 선우 씨를 사설 구급차에 태웠다. 서울에 있는 ‘빅5’ 병원 중 하나인 A 병원으로 향했다. “예약 안 하셨으면 진료받기 어려우세요. 오늘은 돌아가시고 예약하신 날 방문해주세요.” 기대와 달리 병원의 대처는 냉담했다. 하영 씨는 속이 뒤집혔다. ‘절차’대로 하라는 말. 혈액검사 결과지를 들이밀어도 같은 답이 돌아왔다. 병원 인근 숙소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남는 방도 없었다. 택시에 선우 씨를 태우고 또 이동했다. 겨우 찾은 모텔 방에 아들을 눕혔다. 하영 씨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이른바 ‘잘사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아는 병원 없냐, 아는 의사 없냐, 제발 도와달라. 당장 아들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었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모자는 이튿날 ‘절차’대로 예약 진료를 받았다. 당장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 하지만 이번에는 남은 병실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병원에서는 해가 바뀌고 1월 10일이나 돼야 자리가 생길 거라고 했다. 서울 외곽까지 범위를 넓혀봐도, 선우 씨가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은 없었다. 수소문한 끝에 한 곳을 찾아냈다. 경기 부천시에 있는 병원이었다. 선우 씨는 그곳에서 일주일간 머물렀다. 혈소판을 수혈받고, 코피가 흐르면 ‘땜질’을 했다. 치료가 아니라 ‘조치’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2021년 마지막 날, 드디어 대학병원 특실에 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왔다. 지옥 같던 ‘병원 뺑뺑이’는 8일 만에 막을 내렸다. 병원에서 맞는 새해. 그래도 이제는 치료에만 전념하면 좋아질 거라 여겼다. 하영 씨는 ‘이젠 다 잘될’ 거라며, 아들의 걱정까지 떠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님, 지금 선우 씨가 너무 위험해요. 피가 안 멈추고 간 수치가 너무 안 좋아요. 바로 병원으로 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불안한 일상은 금세 무너졌다. 가족들은 울산의 집에서 서울의 병원까지, 350㎞ 거리를 단숨에 달려갔다. 당시 선우 씨는 간 이식 대기자 ‘0순위’였다. 장기 기증자가 나타나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이식받는 사람. 그만큼 상태는 위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장기 기증자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선우 씨는 간성혼수에 빠졌다. 혼수상태에 빠진 채 열흘이 지나자 주치의가 말했다. 염증 수치가 높아져 다른 장기에 영향을 주고 있으니 위독하다고. 몸에서 간을 먼저 떼어내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거예요.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포기해요. 그(간을 떼어낸 뒤) 4일 동안 기증자가 안 나타나면 우리 애는 그대로 죽는다는데. 도저히 안 된다고, 죽어도 못한다고 싸웠죠.” 병원에서는 선우 씨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주치의는 잠든 선우 씨에게 ‘마지막 배웅’을 하라며, 가족들에게 면회 기회를 주곤 했다. 하영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절히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매일 병원 가까운 절로 향했다.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을 기증해줄) 뇌사자가 나타나기를 기도하는 게… 누군가 죽어야 우리 선우가 사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엄마니까 그런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죠. 그게 스스로도 너무 괴로운 거예요.” 입원 20일 만에 기증자가 나타났다. 밤까지 기도를 올리던 하영 씨는 한달음에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반기는 건 병원의 낯선 공기였다. 의료진은 선우 씨의 이식 수술을 두고 찬반 토론을 했다. 의료진 10명 중 수술을 반대하는 사람은 8명. 수술 성공 확률이 30%로 너무 낮다는 이유였다. 생존 가능성이 더 높은 다른 대기자에게 이식하는 게 맞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엄마 하영 씨의 귀까지 전해졌다. 그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가족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했다. 수술에 호의적인 의료진 두 명이 “그래도 아직 스물한 살이고 젊은데, 회복이 빠를 수 있으니 한번 해보자”고 밀어붙였다. 가족들의 호소와 의료진들의 설득 덕분에 선우 씨는 2022년 1월 19일 자정이 가까운 시간 수술대에 올랐다. 10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 선우 씨의 간이 몸 밖으로 나왔다. 의료진은 “간이 완전히 녹아내려 형체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조직검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손상됐다. 간이 녹아버린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이 사실은 훗날 선우 씨 가족에게 또 한 번의 절망을 안겨주게 된다. 수술이 끝나고 긴 잠에서 깬 선우 씨. 수술 전 약 2주 동안의 기억이 사라졌다. 간 손상이 심해 뇌의 인지기능도 떨어졌다. 배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십자 모양의 수술 자국이 남았다. 커다란 흉터는 통증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제 청춘을 빼앗긴 기분이죠.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하필 내가 아파야 하는 걸까. 저는 그냥 취업을 빨리 하고 싶었던 건데.”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을 알고 있던 선우 씨는 일찍 철이 들었다. 빨리 돈을 벌어 부모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어서 마이스터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등급생 중 ‘1호’로 서둘러 취업했다. 첫 월급을 받은 때부터 매달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 그 보람은 선우 씨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선우 씨는 수술 4개월 뒤인 2022년 5월 회사를 나왔다. 회사를 퇴사한 과정에 대해서는 선우 씨와 사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선우 씨는 “사직서와 같은 문서에 서명한 기억이 없다”고 주장했고, 회사는 “사직을 권고한 사실이 없다”고 강조했다. “지금 당장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는데, 돈이 계속 나가니까 죄송하고 눈치 보이죠. 생활에 제약도 많고, 친구들처럼 놀지도 못하고. 회복하더라도 약값은 계속 평생 나가니까 그것 때문에 산재 신청을 한 건데, 만장일치로 기각됐더라고요.” 그해 9월에는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기 위해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신청서’를 제출했다. 답변을 듣기까지 1년 하고도 8개월이 더 걸렸다. 결과는 ‘불승인’. 2024년 5월에 나온 답이다. “산재 승인 안 되면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판정위원) 전원 불승인이라고 하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제가 사업장에 문제가 있다고 (근로복지공단에) 말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제 의견은 하나도 반영이 안 돼 있고, 그냥 회사가 하는 말만 있더라고요.” 반도체 공장에 들어간 열아홉 고등학생 선우 씨는 1년 만에 간이 녹아내렸다. 평생 약을 복용해도 언제 또 건강이 악화될지, 재수술을 몇 번이나 하게 될지 알 수 없다.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반도체 소년’. 그는 가혹한 세상에 홀로 내던져졌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스태츠칩팩코리아의 반론을 듣고자 지난달 19일부터 약 30차례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지난달 30일 인사팀 직원과 연락이 닿았다. 그는 “사건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며 추후 연락 줄 것을 요청했지만, 3시간 뒤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안내드리기 어렵다, (산재와 관련한 일은) 근로복지공단 쪽에 문의해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시 총무팀을 통해 연결된 안전팀 관계자는 “연중 2회 안전교육을 수행하고 있다”는 등 약 40분간 안전관리 방침에 대해 설명했지만, “자신이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며 비보도를 요청했다. 또 한 번 인사팀 임원급 관계자에게 연락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판단에 이견이 없다”며, “회사는 절차에 따랐을 뿐 특별히 근로자(김선우 씨)와 분쟁적인 이슈는 없었다”고 답했다. 그리고 지난 2일 안전팀 관계자는 기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김선우 씨에게) 사직을 권고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했다”며, “회사는 ‘김선우 씨에게 헌혈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사내에 공지해 도움을 줬다”고 밝혔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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