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아빠는 아홉 살’… 돌봄청년 하라 씨와 함께한 1박 2일
낮은 빌딩들 사이 가파른 1차선 좁은 길을 버스가 올라갔다. 서울 성북구 ‘최고 높은 곳’에 강하라(31) 씨가 살고 있다. 아홉 살 지능의 아버지 강성종(60) 씨와 단둘이. 기자는 지난 14일부터 이틀간 두 사람과 함께했다. 갈색 벽돌이 겹겹이 쌓인 양옥 주택.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철문 옆에서 나뭇가지를 치고 있던 강성종 씨를 만났다. 그는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반쯤 감긴 눈이 아이처럼 반짝였다. 하라 씨는 줄곧 아빠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성종 씨가 케이크를 포크로 찍는 순간 하라 씨가 입을 열었다. “아빠, 기자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어?” 하라 씨는 아빠에게 ‘매너’와 ‘주도성’을 가르치고 있다. 성종 씨는 기자가 사간 케이크를 입에 넣으며 멋쩍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우리 딸은 꼭 표현을 하라고 해요.” 지난 10일은 아빠 성종 씨의 생일이었다. 하라 씨에겐 1년에 한 번 때 맞춰 축하하는 것도 버겁다. 적게는 하루 12시간, 많게는 14시간씩 일을 하면, 밤 10시가 훌쩍 지난다. 지적장애인 아버지를 부양하고, 3000만 원이나 되는 빚을 갚으려면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작년에 너무 힘들어서 심리상담을 받았는데, ‘딸 연습’을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빠를 돌보기 시작한 지 4년째였던 지난해. 하라 씨는 휴식이 절실했다. 일과 간병의 굴레는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때 만난 심리상담사가 은인이었다. 그는 하라 씨가 보호자의 역할만 하고 있다며, ‘딸 역할 해보기’를 권했다. 아빠를 통제하고 책임만 지는 게 아니라, 어리광도 부리고 부탁도 해보라는 거였다. 하라 씨가 아버지 돌봄을 전담한 건 2019년부터다. 그전까지는 성종 씨의 노모, 즉 하라 씨의 할머니가 아들과 손녀를 돌봤다. 할머니 건강이 악화되면서 요양을 위해 시골로 가셨고, 이듬해 돌아가셨다. 집에는 단출한 두 식구만 남았다. 처음엔 각자 생활비를 벌었다. 성종 씨는 일용직 건설 노동자로, 하라 씨는 기타 레슨과 각종 아르바이트로. 넉넉한 형편은 아니어도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여유는 있었다. 아빠에게 집안일을 가르치고, 한글 공부도 시작했다. 그때는 ‘그래도’ 견딜 만했다. 불행은 예고 없이 닥쳐왔다. 지적장애인 성종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30여 년간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했다. 긴 세월 ‘막노동’에 몸이 버티지 못했다. 어깨와 무릎의 연골이 찢어졌다. 허리 디스크도 두 군데가 돌출됐다. 그때부터 지적장애인 아빠를 돌보는 건 온전히 하라 씨 몫이 됐다. “기자님, 여기부터가 진짜 영케어러의 일상이에요.” 영케어러(Young-carer).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이나 청년을 가리키는 말. 하라 씨는 ‘진짜 일상’을 보여주겠다고 예고했다. 그는 자세를 고쳐 앉아 성종 씨를 마주 봤다. 오늘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연체된 보험료였다. 성종 씨가 5개월간 미납한 보험료는 82만 3770원. 하라 씨는 절반씩 부담하자고 제안했다. 돈 이야기에 성종 씨이 표정이 굳었다. “아빠가 지금까지 치료받는다고 병원비 많이 썼잖아. 그동안 낸 돈 일부 환급도 받고, 앞으로 나갈 치료비도 생각하면 (보험) 부활 시켜야 돼.” “돈 없어. 놔둬.” “보험 없앨 거야? 그럼 아빠 아프거나 다치면 수술도 못 받아. 100만 원 낼 거, 300만 원 내야 될 수도 있어. 자전거 타다 넘어지면 수술 못 받는다고. 아빠 나이 더 많아져서 보험 들려고 하면 보험료도 더 비싸져. 지금 빨리 반반 내자.” 부녀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하라 씨는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설명하려고 애썼다. 성종 씨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내냐는 식이었다. 하라 씨는 대안을 제시했다. 두 달치 미납금만 먼저 해결하자는 것. 성종 씨가 입으로 쩝 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어떻게 하면 된다고?” 타협 뒤에는 해결할 숙제가 생겼다. 은행 애플리케이션에 들어가 계좌이체를 하는 것이다. 하라 씨는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직접 계좌이체 화면에 접속할 때까지 기다린다. 성종 씨의 손가락이 핸드폰 액정 위에서 방황했다. 서른 번 넘게 해 본 일이지만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오늘은 제 일정이 여유로워서 괜찮아요. 만약 제가 퇴근하고 밤 9시, 10시 돼서 들어왔는데 이런 일들을 밤에 또 해요, 그러면 일이 끝나지가 않는 거죠.” 성종 씨가 계좌이체를 하는 데 걸린 시간 30분. 아빠가 핸드폰을 쥐고 분투하는 동안, 하라 씨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한다. 성종 씨가 포기하려는 타이밍에 약간의 힌트를 주고 응원을 하는 요령도 생겼다. 출근하기도 전에 하라 씨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날은 아빠를 헬스장에 바래다주고 레슨실로 가는 일정이 남아 있었다. 성종 씨는 오전에 10분 운동하고 왔다며 헬스장 가기를 거부했다. 하라 씨는 능숙하게 아빠를 회유(?)했다. 성종 씨가 운동하는 모습을 취재하면 좋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성종 씨는 그제야 나갈 채비를 했다. 한 손에는 그가 직접 내린 커피를 챙겼다. 헬스장에 있는 트레이너 선생님에게 줄 선물이다. 부녀의 걷는 모습은 참 재미있다. 토끼와 거북이 같달까. 하라 씨가 잰걸음으로 빠르게 앞서 걸으면, 성종 씨는 뒤에서 느릿느릿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다. 하라 씨는 이동 중에도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에게 이동 시간은 장애인가족지원센터, 기타 레슨생, 레슨실 사장님과 연락하는 시간이다.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한숨을 쉬며 성종 씨를 재촉하기도 한다. 역시나 한 쪽 귀에는 전화기를 대고서. 성종 씨는 딸의 한숨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등학교 동창들과 있었던 일화를 기자에게 들려줬다. 그는 지난 2월 서울 숭인동에 있는 진형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곳은 평생교육시설로, 학급 평균 연령이 67세에 달한다. 동년배들이 대학에 진학한 이야기, 87세 초고령 학생 이야기가 뉴스에 보도된 일은 그의 자랑거리다. “아빠, 나 기자님이랑 레슨실 가 있을 테니까 운동 마치고 7시까지 레슨실로 와. 너무 일찍 오지 말고. 알았지?” 성종 씨는 운동에 흥미가 없는지 헬스장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5분 동안 자리를 세 번이나 옮겼다. 처음에는 트레드밀, 다음에는 상체, 다음에는 하체.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헬스장에는 장애인 재활을 돕는 트레이너 선생님이 있다고 해서 등록했다. 그것도 하라 씨의 역할이 컸다. 국제구호개발 단체인 월드비전에서 ‘자기계발비’ 지원을 받았다. 언덕배기 집에 살면서 고도비만에 관절까지 좋지 않은 아빠를 위한 일이었다. PT 20회를 끊고 남은 돈은 언어치료, 인지치료, 재활치료비로 쓰인다. 남은 돈은 이제 겨우 10만 원 남짓이다. 하라 씨가 헬스장으로, 여러 치료센터로 아빠를 보내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 아빠는 동묘 앞 벼룩시장을 즐겨 찾았다. 성종 씨는 고장 난 데스크톱, 노트북, 모니터, CD 등을 ‘바가지를 쓰고’ 비싼 값에 사온다. 그리고 작은 방에 숨겨둔다. 아빠의 ‘보물’을 찾아내 고장난 것을 골라 버리는 일은 하라 씨의 몫이다. 심지어 아빠가 밖에 나가서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하라 씨는 그를 “어딘가에 꽂히면 완전히 몰두한다”고 설명했다. 그 때문에 실종신고를 몇 번 하기도 했다. 지능이 7~9세 수준인 아빠가 밖에서 사고라도 당할까봐 늘 노심초사한다. 다행히 성종 씨는 지인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내가 미혼모도 아닌데 왜 이렇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도 들고, 평범한 가정이 너무 부러운 시기도 있었고…. 그냥 그런 평범한 것들이 좀 부러웠던 거 같아요. 지금은 부러워하진 않아요. 소용이 없으니까.” 하라 씨는 헬스장에 아빠를 데려다 놓고 레슨실로 향했다. 지하철로 네 역 떨어진 곳에 있는 3층짜리 건물. 그곳에 하라 씨의 레슨실이 있다. 이날은 두 타임만 소화하면 퇴근할 수 있는, 비교적 여유로운 일정이었다. 저녁 6시를 조금 넘기자, 갑자기 레슨실 안으로 성종 씨가 들어왔다. 하라 씨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수강생에게 복습하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아빠를 데리고 나갔다. 레슨실 옆 빈 공간에서 성종 씨는 한글 공부를 했다. 3층에 있는 학원 아르바이트생에게 지도를 부탁한 것이다. 하라 씨의 일상은 늘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라 씨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와 기타 레슨을 이어갔다. “저녁식사는 보통 3층에 계신 학원 사장님이랑 같이 해결해요. 제 사정을 생각해주시는 고마운 분이죠.” 하라 씨는 식비를 쓰지 않는다. 웬만하면 3층 학원 사장님이 끼니를 때울 때 숟가락 하나 더 올려 같이 먹는 식이다. 혹은 운영하는 블로그에 협찬을 해준 식당에서 해결한다. “사람들은 제가 ‘돈미새(돈에 미친 사람)’인 줄 알아요. 근데 상관없었어요. 저는 먹고살려고 하는 거니까.” 레슨이 끝났다. 레슨실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 밑반찬 세 개뿐인 조촐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성종 씨는 자연스레 식사를 시작했다. 하라 씨는 이날도 쉽게 숟가락을 들 수 없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 하라 씨는 또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다. 기타 레슨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어려웠다. 기타 레슨은 수능시험 직후, 학교 방학 기간, 새해, 졸업 시즌 등이 성수기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수입을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성종 씨 돌봄 비용에 레슨실 월세와 관리비, 병원비, 공과금 등을 내면 남는 게 없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하라 씨를 ‘돈미새’로 만든 결정타는 다름 아닌 친척들이 날렸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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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살인 청년’ 강도영 씨 가석방으로 출소 [누가 아버지를 죽였나 19화]
‘간병살인’ 청년으로 알려진 강도영(가명) 씨가 만기 약 9개월을 앞두고 7월 30일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강 씨는 뇌출혈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홀로 돌보다 생활고에 시달려 끝내 부친을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지난 2021년 5월 구속됐다. 강 씨는 살인 고의가 없었다며 유기치사를 주장했으나, 1심-2심 재판부는 모두 존속살해 혐의를 적용해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강도영 씨의 사연은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2021년 11월부터 진행한 프로젝트 ‘누가 아버지를 죽였나’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관련 기사 보기 – “쌀 사먹게 2만원만.. 22세 청년 간병인의 비극적 살인] 강 씨의 부친 고 강영식(가명. 당시 56세) 씨는 지난 2020년 9월 목욕탕에서 뇌출혈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강영식 씨는 응급 수술을 받고 의식을 찾았지만, 사지 마비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콧줄을 통한 경관급식으로 식사를 했고, 대소변 처리 역시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강영식 씨는 뇌출혈 전문병원과 요양병원에서 약 8개월 치료를 받았으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다. 간병비 포함 치료비 약 2000만 원이 아들 강도영 씨에게 청구됐다. 입대를 위해 대학 휴학 상태였던 강 씨(당시 22세)에겐 돈이 없었다. 강 씨의 삼촌이 직장에서 퇴직금을 중간정산 받아 치료비를 댔다. 강영식 씨는 계속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으나, 아들 강도영은 더는 돈을 구할 수 없었다. 강도영 씨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어머니와 헤어졌다. 엄마의 거주지는 물론 생사도 모른다. 강 씨는 2022년 4월 23일 아버지를 퇴원시켜 집에서 홀로 돌봤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을 내고 살던 집의 월세는 아버지 입원 직후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도시가스, 인터넷, 휴대폰이 요금 미납으로 차례대로 끊겼다. 강 씨는 “쌀 사먹게 2만 원만 빌려달라”는 문자메시지를 지인에게 보내는 처지가 됐다. 결국 강 씨는 5월 초부터 아버지를 안방에 방치했다. 아버지의 시신은 5월 7일 안방에서 발견됐다. 강도영 씨는 집에서 체포돼 구속됐다. <셜록> 보도 이후 많은 시민이 돌봄과 간병 살인, 특히 ‘영 케어러(young carer)’ 문제에 관심을 갖고 ‘강도영 구명운동’에 나섰다. 당시 김부겸 국무총리와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은 공개 사과를 하고 제도 개선을 약속했다. 이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영 케어러 실태조사에 나서는 등 관련 대책 정비에 나서기도 했다. [관련 기사 보기 – ‘강도영 선처 6천명 탄원.. 총리, 장관, 대선후보도 관심] 구속된 강도영 씨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밝힌 시민도 많았다. 특히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은 2021년 11월부터 월 1회 강 씨를 면회하며 심리, 생활지원을 해왔다.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 전 국회의원은 구치소와 교도소에서 강도영 씨를 수차례 직접 만나는 등 강 씨가 ‘전태일-이소선 장학재단’ 제1호 장학생으로 선발되는 데 힘을 보탰다. “강도영 씨의 사연을 처음 접했을 때 ‘타인의 도움이 없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하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오빠 전태일도 22세 때 사망했는데, 오빠 생각도 많이 났다. 오빠가 외로웠을 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생각도 많이 했다. 강도영 씨가 사회에서 잘 적응해 살 수 있도록 계속 힘을 보탤 생각이다.” 전순옥 전 의원이 지난 7월 말 <셜록>과의 통화에서 한 이야기다. 출소한 강도영 씨는 고향 대구광역시의 한 친구 집에서 머물고 있다. 곧 살아갈 집을 마련해 독립할 예정이다. <셜록> 역시 강도영 씨의 생활을 지원할 예정이다.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