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섹슈얼리티를 제물로 바친 남자들> by 남함페 정민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글을 쓰겠노라 호언장담 해놓고 마감일까지 한참을 빈 화면인 채로 머리만 벅벅 긁었다. 모두 나의 부족한 식견과 필력 탓이지만, 변명거리가 있다. 남성인 내가 뭐라고 섹슈얼리티에 대해 알은 체를 늘어놓는단 말인가? 이미 온 세상이 남성 섹슈얼리티로 가득하지 않던가? 그런데 남성이 또 나서서 남성 섹슈얼리티를 말한다니? 게다가 나는 앞장서서 ‘올바른 섹슈얼리티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하며 깃발을 펄럭일 만큼 자랑스럽고 올곧은 인사도 아니다.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삶에 즐비해있다. 그럼에도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건 내가 글을 완성하고 송고까지 마쳤다는 의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리한 걸까. 내가 백지의 공포를 이겨낸 데는 아래와 같은 이유가 있다.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이러한 고민은 앞선 글 "네? 남성 섹슈얼리티요? 지금? 여기서요?"에 잘 나타나있다. 본 글은 프롤로그의 바통을 이어받아, 어쩌다 남성의 섹슈얼리티가 ‘방법을 불문하고 섹스와 성욕으로 돌진’하는 일차원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동시에 고단하고 빈곤한 처지에 이르렀는지 조목조목 따져보려 한다.
나의 연애는 저지르고 보는 우당탕탕 행동주의였던 동시에 유치와 무지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요란한 베틀이었다. 편의점 야간 근무를 하던 나를 보고 애인은 ‘무서워서 어떻게 이 시간에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헛웃음을 쳤고, ‘생각보다 한가롭고 재밌으니 너도 나중에 해보라’며 애인을 귀여워했다. 그와 헤어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당시의 내가 가진 순진무구한 폭력성을 깨달았다. 그는 밤길이 겁이 나 그토록 좋아하는 운동도 낮에만 하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밤은 한가로이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도 자랑스럽지 않은 기억에는 월경에 대한 무지도 있다. 부끄럽게도 나는 오랫동안 월경이 한 달에 딱 한 번 찰나에 이뤄지는 것으로 알았다. PMS(월경전증후군)도 애인을 통해 알게 됐다. 애인이 PMS로 앓아 눕고 나서야 말이다.
그 전까지 월경은 내게 마법의 날 또는 여자에게 마카롱을 사줘야 하는 시기로 통했다. 어쩌면 내 문제로 생각해본 적 없는 어떤 죽은 사실에 불과했다. 그토록 수다스럽던 내가 월경과 PMS 앞에서 침묵을 지킴으로써 ‘나는 월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시민이에요’를 자수하고 있던 그때, 애인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는 잠시 허공에 머물다 다른 이슈로 옮겨갔다. 그 날 일은 이게 전부이지만, 회상할수록 참 서글픈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애인의 침묵은 남성 섹슈얼리티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월경을 몰라도 되는 지식으로 여기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를 갖추며, 침묵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의사소통 기술까지 겸비한 나는, 몰라도 사는 데 문제가 없는 남성이었을 뿐이다. 나의 무지는 편의점 야간 근무에 이어 이렇게 또 한 번 증명되었다.
이 두 사건은 단순한 ‘연애 썰’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첫째는 내가 거칠게 말해 세상의 절반인 여성의 삶과 현실에 까막눈이었으며, 둘째는 성을 주제로 한 의사소통에도 미숙했다는 것이다. 이는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의 완전한 부재를 뜻한다. 오래도록 이어진 차별적인 성문화를 그대로 답습하였고, 여기에는 의심 한 점이 없었다. 애인과 연애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막상 애인이 어떤 삶 속에서 사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애인에게 성적 매력을 느꼈음에도 애인의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무관심했다. 내가 성적 존재로서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척척 키워가고 있었을 때, 상대도 나처럼 한 성적 존재로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나는 이때를 떠올리면 아득하기만 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나는 나의 성장과정을 반추하며 한 가지 단서를 포착할 수 있었다. 바로 남성연대다. 돌이켜 보면 학창시절은 하나의 생존게임을 방불케 했다. 남학생으로 구성된 무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갖은 수를 짜내야 했던, 무리 내 소속감이 목숨처럼 중요했던 시기였다. 이때 무리를 하나로 만들어주는 건 성적 발화였다. 야한 농담으로 똘똘 뭉친 무리는 연신 키득거리며 온갖 날 것의 표현을 주고 받았고, 그 와중에 여학생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갑작스레 모두 입을 다무는 방식으로 여성을 타자로 만들며 모종의 펜스를 형성했다. 사춘기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으로 치부하기에는 위계를 상당히 계산적으로 작동시켰고, 여성을 대상화하고 성을 재미와 놀림거리로 삼는 폭력적인 남성문화를 형성했다.
이러한 남성연대는 대학 생활과 군 생활을 거쳐 더욱 공고해졌다. 해봤는지, 안 해봤는지, 해봤다면 어디까지 해봤는지가 그토록 중요했다. 애인이 있는 남성은 묘하게 무리에서 승리자의 위치를 점유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애인이 없는 남성은 ‘모쏠’, ‘아다’라는 수식어를 짐짓 스스로에게 부여하며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음을 시인하고 조언에 귀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여학우를 성적으로 안주 삼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훈련소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문화가 펼쳐졌다. 성관계 경험을 훈장처럼 떠벌리고, 애인과의 사적 관계를 발설하거나,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어떻게 해보겠다며 속내를 분출하는 발언까지 있었다. 그러나 특정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기에는 남성연대 자체가 너무나 공고했고, 여기에 동조하지 않는 자를 찾기 어려웠으며, 그런 자가 있다면 응징 또는 시비의 대상이 되거나 ‘게이’, ‘찐따’로 불리며 무리에서 배척되기 십상이었다.
청소년기-청년기-군대로 이어지는 남성연대의 생애주기 속에서 나는 때로 공모하고 때로 구분되려 발버둥쳤다. 어느 날은 적어도 같이 웃지는 않았으니 괜찮다고 합리화했고, 또 어느 날은 읽을 책이 있다며 혼자 있을 공간을 어떻게든 찾아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내가 누군가를 대상화하는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교묘한 우월감과 검은 우산 속에 있는 듯한 안정감을 내면화했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한 성별 권력이었다. 내가 여성이 밤길을 편히 다닐 수 없음에 무지하고, 월경과 PMS에 대해 아는 바가 전무했던 것은 이 사회에서 남성으로서 특권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며, 섹슈얼리티에 아는 바 없이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배경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위치성의 토대를 공고하게 만든 것이 성장과정 속 연속적인 남성연대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 남성연대는 문자 그대로 연대감을 형성하며 하나의 단단한 집합체로 존속할까? 그렇지 않다. 연대감은 집단 안의 평등한 공통성을 근거로 형성된다. 그러나 남성연대는 어떤 대상을 놀림거리로 삼고 배척함으로써 맺어진, 일시적 공모의 형태에 가깝다는 점에서 연대라고 할 수도 없다. 뚜렷한 공동의 달성 목표가 있고 그것이 획득되면 해산하는 이익집단과도 다르다. 공동체라는 언어도 맞지 않다. 누군가를 배제함으로써 소속감이 강화되는 공동체는, 실상 차이의 이해와 다양성 존중이라는 공동체가 갖는 본연의 속성과 맞지 않다. 다시 말해 중심과 주변, 나와 타자를 구분지어 탄생한 집단은 그 안에서도 계속해서 차이의 경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연대 또는 공동체의 속성을 가질 수 없다. 그 당시에는 안정감과 소속감의 획득을 위해 효과적이었을 수 있으나, 허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 빈곤한 관계일 뿐이다.
남성은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섹슈얼리티를 다뤄본 경험이 거의 없다.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돌보는 대신 타인을 욕망하는 법부터 배우고, 그 욕망의 강도와 실천 여부를 과시하고 힘겨루기 했기 때문이다. 성을 재미로 소비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진지한 탐구의 대상으로 여겨본 적이 없다. 모두 한 번쯤은 웃어넘길 수 없던 성적 고충과 두려움이 있었을 텐데, 이를 진중하게 토로하거나 위로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한 염려를 드러내는 순간부터 남성문화 속에서 약자임을 발표하는 꼴이 되므로, 공감적 지지와 조력의 언어 대신 은근한 무시와 정상 기준의 압박을 강화했을 것이다. 이렇게 채우지 못한 섹슈얼리티의 영역은 연애 빈도, 성관계 횟수, 시간, 성기의 크기와 길이 따위의 정량화된 수치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숫자로 구성된 수치로서의 섹슈얼리티는 더 길게, 더 크게, 더 오래! 만을 강조하며 상대와의 진솔한 소통에는 무관심 하게 만들고, 스스로 타인과 비교하며 영원한 불만족에 빠지게 할 뿐만 아니라, 그저 "좋았어? 얼마나 좋았어?"라는 말로 짜게 식게 만드는 미숙함으로 이어진다. 자신에 대한 이해를 키우지 못한 만큼, 타인에 대한 몰이해는 커진다. 남성이 섹슈얼리티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잃은 것은, 관계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과 질적 성장이다.
이 시대에 희망을 말하는 자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절망을 설교하는 자는 개자식이다.
_볼프 비어만
지금의 남성 섹슈얼리티는 해롭다. 완전히 폭주하거나 작동을 멈춰버리는 방법 외에 스위치가 없는 열차와 같다. 희망을 가벼이 발음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나 그리고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은 남성을 변화 불가능한 상수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려 한다. 열차가 탈선하거나 시동이 꺼지기를 바라지 않으며, 남성이 섹슈얼리티에 대해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쉬이 절망을 논하지 않겠다. 그럼 희망도, 절망도 논하기 어려운 이 간극 속에서 무엇을 기대한다는 말인가?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는 미명하에 내달리는 대신, 정지하는 한이 있더라도, 왔던 길을 거슬러 한참을 뒷걸음질 치더라도, 다음의 질문을 반드시 길 위에 떨어뜨려 두기를 소망한다.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 ‘남성 섹슈얼리티 새로 쓰기’는 이러한 희망과 절망 사이, 간극의 비탈길에서 출발한다. 이 간극의 비탈길에 버티어 서서, 한 발자국의 변화라도 만들어내고자 한다. 열차가 지나온 과오를 씻을 수는 없더라도, 다시 방향을 잡은 열차가 새로운 풍경을 선물할 수 있도록, 종국에는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1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yEtZVz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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