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의 문단속’ 보셨나요?
‘스즈메의 문단속’은 ‘스즈메’가 ‘소타’와 함께 재난을 막기 위한 여정을 떠나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일본 각지의 폐허에 재난을 부르는 문이 열리고, ‘스즈메’는 문을 닫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다 고향에서 자신이 잊고 있었던 상처를 마주하게 됩니다.
“12년 전에 일어난 재해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거든요. 지금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갈 수 없어서 피난 중입니다.”
“제 딸이 12살인데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했던 해에 태어났거든요. 그 재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셈이죠. 제 딸처럼 재해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는 세대들이 일본엔 점점 늘어나고 있고요.”
이 영화는 12년 전 동일본대지진을 소재로 제작되었습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서 “오래도록 잊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이를 다뤘다고 밝혔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을 ‘돌려주며’ 재난을 막아내고, 또 나아가는 과정을 통해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배경과 함께 영화를 보니 재난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재난은 사회에 상처를 남깁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흐려집니다. 재난 피해자의 이야기를 터부시하는 분위기도 생깁니다. 이는 산업재해와도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연재해와 산업재해는 다른 측면이 있지만, 우리에게 남는 고민은 닿아있습니다. 피해자를 어떻게 치유할지, 그 과정에서 공동체의 역할은 무엇인지 말입니다.
어떤 죽음을 기억하고 있나요?
안전보건공단 산업재해 통계자료에 따르면,
2020년 재해자 108,379명 사망자 2,062명
2021년 재해자 122,713명 사망자 2,080명
2022년 재해자 130,348명 사망자 2,223명
하루에 여섯 명 이상의 사람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오늘도 누군가는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1년에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일하다 다치고, 아프고, 2천 명이 사망한다니, 믿어지시나요?
이것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건 우리가 아는 죽음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심지어 통계자료에 모든 산업재해가 담긴 것도 아닙니다. 기록되고, 기억되고, 사건화되는 죽음은 적은데 우리는 그마저도 잊어가고 있습니다.
2016년에는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일하던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망했습니다. 스크린도어 수리는 안전을 위해 2인 1조로 작업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적어서 혼자 수리에 나섰고, 전동차에 치여 사망했습니다.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하청업체로 위험을 외주화하는 사회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지만, 여전히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2017년 전주 콜센터에서 일하던 홍수연 님이 업무 스트레스로 자살했습니다. 해당 업체는 시간 외 근무 수당을 지급하지 않으면서도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퇴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현장실습’을 명목으로 끊임없는 감정노동과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 공간에, 분초 단위로 노동자를 통제하는 공간에 보내졌던 홍수연 님은 그렇게 죽음으로 내몰렸습니다.
2018년에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하청 노동자 김용균 님이 사망했습니다. 2년 전 구의역에서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2인 1조 근무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김용균 님은 암흑 속에서 휴대폰 불빛에 의지한 채, 홀로 개구부 안 문제를 확인해야 했습니다. 보고할 사진을 찍기 위해서 안전장치가 없는 컨베이어 벨트 위로 머리를 밀어 넣어야 했습니다. 위험을 외주화하는, 비정규직에게 더 잔혹한 현장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2020년에는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 건설 현장 화재로 38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다쳤습니다. 한익스프레스는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자 폭발 위험이 있는 작업을 동시에 하도록 했습니다. 냉동창고의 결로를 방지한다며 비상구 대피로를 폐쇄해 피해가 커졌습니다. 시공사에 벌금, 관리자 2명 실형이 선고되었으나 한익스프레스는 면죄부를 받았습니다.
2021년에는 평택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이선호 님이 사망했습니다. 300kg이나 되는 컨테이너의 벽체가 무너졌고, 깔렸습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컨테이너 작업을 할 때는 사전 계획을 세우고 안전조치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전관리자는 물론 기본적인 안전핀, 장비조차 없었습니다. 이전에도 같은 문제로 인해 사고가 있었음에도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산재 사망까지 이어졌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도 사망사고가 있었습니다. 경남 제지업체 공장에서는 20대 노동자가 끼임 사고로 치료 중, 양산 제조 공장에서는 압력 용기 부품에 맞아 치료받던 중 사망했습니다. 김해 제조공장에서 지게차가 전복되며 깔려 사망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올해 1분기에만 128명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처럼 매일 수많은 사람이 일터에서 사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죽음은, 사회에 제기되는 죽음은 많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죽음, 여전한 사회
죽음이 쌓이고, 분노가 모여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정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법 시행 이후 첫 재판이 있었습니다.
건설노동자가 공사 현장에서 추락, 사망한 사건에서 원청 법인은 1억 6천만 원, 하청 법인은 1천만 원의 벌금을 받았습니다. 원청 대표이사는 징역 2년(집행유예 3년), 안전보건 총괄책임자(현장소장)는 징역 8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어진 한국제강 사건에서는 한국제강 법인 벌금 1억 원, 대표이사가 징역 1년, 법정 구속되었고 협력업체 대표는 징역 6개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전에도 같은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중대재해가 발생했음에도 재판부는 최저 형량을 선고했습니다.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인해 진짜 책임자인 원청의 책임이 강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의미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먼저, 전체 사업장의 68% 이상에 해당하는 5인 미만 사업장은 중대재해처벌법을 적용받지 못합니다. 43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법이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기소조차 되지 않습니다. 2022년에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는 사고만 250여 건이 발생했음에도 기소된 것은 14건이 전부입니다.
또 앞서 본 것처럼 기소되어 판결이 나온다고 해도 너무나 낮은 처벌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경총은 ‘매우 엄중한 형량’이라며 처벌 규정이 과도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죽여도 벌금 몇 푼이 고작이고, 징역은 1년, 그마저도 다른 책임자들은 집행유예에 그쳤습니다. 안전이 우선되었다면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인데도 말입니다. 이게 과도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중대재해를 처벌하는 것은 ‘안전한 일터’의 중요성을 공유하고 안전에 책임이 있는 기업이 그 책임을 이행하도록 하기 위함일 겁니다. 이윤을 위해 안전을 방기한 기업을 처벌하고, 다음, 그다음의 산업재해를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사건과 처벌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슬프게도 결국 사회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반복되는 죽음은 숫자로만 기억되고, 우연하고도 불행한 사고로 여겨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쉬이 이야기하기도 어려워집니다, 해결된 것이 없어 반복해서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사회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스즈메의 문단속’ 영화에서 ‘스즈메’가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역할을 줍니다. 그저 시혜적으로 동정 어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즈메’가 할 수 있는 일을 줍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역할을 하며 ‘스즈메’는 치유의 과정으로 나아갑니다. 숨겨두던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합니다.
재난을 겪은 사회의 역할은 무엇일지 생각해 봅니다. 우선, 사회는 그 이전과 달라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사망으로 괴로워하는데, 다음날 똑같은 죽음을 맞는 이가 생긴다면 어떠한 희망도 찾을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사건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 권리를 보장하고, 은폐·조작·피해자 탓 없이 원인을 밝히고, 책임자를 분명히 처벌하는 것은 당연히, 또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참사가 발생한 우리 공동체의 구조를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안의 우리는 피해자와 주위 사람들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며 사회가 변화할 수 있도록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을 제정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의 과제가 많습니다. 끊임없이 주목하고, 슬픔을 넘어서서 사건의 본질을 짚어내고,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남은 사람들의 이후 삶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자유롭게 의견을 남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코멘트
6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각자의 방법으로 마음에 새기고, 기회가 있을때 또는 기회를 만들어 목소리를 내야 겠죠. 언론으로 인해 노동자의 사고와 죽음에 매우 둔감해져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게나마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따지고 지적해야 겠지요.
제이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중대재해처벌 판결에도 의의가 있지만, 여전히 법과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 자체가 생명이 아닌 '법인'으로서의 기업의 이윤추구에 치우쳐 있고, 그래서 한계가 명확했던 것 같습니다. 이 법은 점점 더 세밀해져야 하고 그 책임소재를 명확하게, 그리고 넓게 볼 수 있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발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대 재해는 기업의 범죄다."
"산재는 살인이다."
사진 속의 이 구호가 현 시대의 노동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를 막기 위한 중대재해처벌법이었는데... 유명무실한 상황으로 가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위험한 노동환경을 개선하지 않는 것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과 같이 엄중하게 봤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성실하게 일하다 생을 마감하고 차갑게 외면받는 것 같아 슬퍼요.
법을 제정한다고해서 끝나는게 아니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최근의 중대재해 판결도 의미는 있지만, 한계가 명확해던 것처럼요. 우리 사회가 노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노동자의 편에 선다면 편견부터 갖고 보는건 아닌지 따져봐야 될 것 같습니다.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의 죽음은 산업재해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준 계기였습니다. 무엇보다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온 누군가'가 어떠한 안전조치도 없는 노동환경에서 사망했다는 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이전, 이후로 벌어진 산업재해들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더는 일하다 죽는 사람이 없어야한다'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반면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바꾸었는가?'라는 질문에는 명확한 답을 내놓기 어려운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오히려 해마다 일하다 죽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데 '중대재해처벌법을 기업이 내세우는 주장에 맞춰 후퇴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마주할 때면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그럼에도 남은 사람들이 삶을 지속하고, 더는 일하다 사람이 죽지 않기 위해선 관심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내는 일을 멈춰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을 비롯해 제도적 안정장치를 강화하고, 일하다 죽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도록 문화를 바꿔야 합니다. 스즈메의 문단속에 나오는 치유의 과정처럼 언젠가는 산업재해 피해자, 유가족의 목소리를 담아 일하다 죽지 않는 사회가 만들어지고, 일하다 죽도록 만든 책임자가 제대로 처벌받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