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장에서 숙의의 의미
'숙의'는 일반적으로 “깊이 생각하여 충분히 의논함”을 의미합니다. 민주주의와 공론장 등과 관련해서는 deliberation의 번역어이며, 거의 이러한 맥락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deliberation은 숙의뿐만 아니라 토의, 심의로도 번역됩니다. 이는 deliberation에 “어떤 문제에 대하여 검토하고 협의”한다는 의미와, “심사하고 토의”한다는 의미까지 포괄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민주주의를 더욱 민주적으로 만들기 위한 제도화의 맥락에서 보면, 숙의는 “법원의 배심원, 의회 입법자, 위원회 위원, 혹은 다른 사람들이 이성적 토론 이후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의미합니다(존 개스틸 외, 18).
여기서 ‘제도화'를 일단 제외하고,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숙의는 공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시민, 이해당사자, 활동가, 전문가, 국가 등 다양한 주체가 모여 깊이 숙고하여 논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들리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공론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공론장은 다양한 주체들의 숙의를 통해 공론을 형성하는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와 숙의 공론장
제인 맨스브리지는 “반대만 하는 민주주의"를 넘어 “통합하려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통합하려는 민주주의에서 대중은 서로 존중하는 숙의 과정에 참여하며, 서로 경쟁하는 증거들과 주장들의 경중을 잘 판단한 다음 모두를 위한 새로운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차이를 억눌러버리는 은밀한 체제 순응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존 개스틸 외, 19). 반대와 통합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반대가 아닌 통합’ 혹은 ‘순응이 아닌 저항’의 선택을 강요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이야기만 나눈다고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저항만 한다고 더 나은 사회가 도래하는 것도 아니겠지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저항은 민주주의 내에서의 제도적 변화를 위한 토의의 제도화와 공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활동의 민주주의와 토의의 민주주의는 둘 다 필요합니다.
벤저민 바버는 ‘약한 민주주의’와 ‘강한 민주주의’를 구별합니다. 약한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 이해관계자들이 서로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경쟁하는 것 , 또는 개인적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며, 강한 민주주의는 “개인보다 공동체의 행동에 더 큰 중요성을 두고, 대중이 함께 논의하고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존 개스틸 외, 19). 전자는 다원주의적 접근에 조응하며, 후자는 공화주의적 접근에 조응합니다. 숙의가 이루어지는 공론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민주주의는 후자의 관점과 친화성을 가집니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이며, 대의민주주의는 ‘시민들이 대표자를 선출해 정부나 의회를 구성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 제도’를 의미합니다. 대의민주주의는 최소한의 필수적인 민주주의 제도를 지칭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것만으로는 선거 때 외에는 시민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제도로서의 공론장을 구축하는 것’과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의하는 시민사회 공론장을 활성화’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가 더욱 민주적일 수 있도록 보완 혹은 변형하는 중요한 일이 됩니다. 숙의는 공론장의 필수 전제이며, 숙의 공론장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중요한 방법일 것입니다.
숙의의 필요
숙의는 여러 차원에서 중요합니다. 이론적인 정합성을 갖추기 위해 학자들 주도로 숙의하여 작업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좀더 나은 사회정책을 만들기 위해 정치인, 행정가, 전문가들이 숙의하여 작업을 하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토의하는 과정에서 더욱 깊이 이해하고 성찰하고 정제된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하는 시민역량강화 역시 그만큼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론장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강화의 공간이며, 민주적 대화라는 문화를 형성해내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엘리트에 의한 대의를 넘어 일종의 ‘시민 지성'을 필요로 한다면, 숙의가 이루어지는 공론장만큼 중요한 것을 없을 것입니다. 시민 지성을 형성하는 정부 차원의 제도 공론장이 필요하겠지만, 시민들이 직접 주도적으로 토의를 전개하는 시민사회 공론장 또한 필요하며, 디지털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디지털 공론장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사회적 균열이 드러나고 다양한 주체들이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논의를 하고 있는 현 시대에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활용함으로써 집합적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가장 좋은 수단이 바로 대화와 숙의"이기도 합니다. “신념, 가치, 문화, 혹은 삶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해결 방안을 찾는 데 숙의가 강하고 좋은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다양한 주체들은 숙의를 통해 합의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하더라고 숙의를 거치며 잠정적인 해결 방안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좀더 포용적으로 변하고 수용성이 높아지게 됩니다(존 개스틸 외, 37).
숙의가 있는 공론장이 되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서로간의 생산적인 토의가 활성화 되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주체들이 함께 의견을 나누고 모아가는 공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빠띠 캠페인즈에 함께 하는 우리 모두가 좀더 많이 알게 되고, 좀더 잘 쓰게 되고, 서로 대화를 잘 나눌 수 있고, 좀더 잘 의견을 모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양한 주체들이 권력에 맞서는 목소리를 내고 있고,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주체들이 복잡한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여 새로운 사회계약을 만들어 가야 하는 혼란의 시대입니다. 숙의 공론장이 만능키가 될 수는 없지만 각 집단간의 적대의 재생산에 그치는 것을 넘어 서로간의 간극을 좁혀 좀더 나은 답을 찾아갈 가능성은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숙의가 있는 공론장’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코멘트
2한국 사회에 숙의가 필요한 이유와 최근 한국 사회의 문제를 돌아볼 수 있는 문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 나은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토론과 숙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가 퍼지면 좋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측면으로만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더욱 심하다 느껴집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가 논의되는 맥락에는 이러한 협소한 이해의 문제도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숙의와 공론장 문화를 통해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위기를 헤쳐나가는 수밖에 없겠지요. 빠띠의 노력이 이를 촉진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