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6일, 국가인권위원회는 국무총리, 보건복지부장관, 행정안정부장관, 여성가족부장관, 통계청장에게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가 정부의 정책 대상으로 가시화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사항을 권고했습니다.
1. 국무총리에게: 중앙행정기관 등이 수행하는 국가승인통계조사 및 실태조사에서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의 존재를 파악하도록 하는 내용의 지침을 마련할 것
2. 보건복지부, 행정안전부, 여성가족부 장관, 통계청장에게: 각 기관이 실시하는 국가승인통계조사 등에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 관련 조사항목을 신설할 것
3. 통계청장에게: 통계청이 관리하는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를 조속히 개정하여 성전환증을 정신장애 분류에서 삭제할 것
정부의 판단
이에 대해 국무총리, 보건복지부장관, 행정안정부장관, 여성가족부장관, 통계청장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1. 부처 실태조사의 모집단이 되는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성별 정체성을 별도로 조사하지 않고 있으므로 표본이 적어 성별 정체성 등을 조사하는 것이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어렵다.
2.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사생활 침해 우려가 있는 조사항목에 대한 응답 거부가 증가하고 있어, 사회적 합의, 현장조사 가능성, 조사 불응 등을 고려하여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3. ICD(국제질병분류) 제11판의 반영 시 검토하겠지만, 2026년부터 적용되는 “KCD(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 제9차 개정의 고시(2025. 7.)에는 반영이 어렵다.
결국 인권위는 2022년 12월 28일 상임위원회에서 국무총리를 포함한 정부 각부처에서 인권위의 권고를 불수용하였다고 판단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보도자료)
인권위의 입장
인권위는 트랜스젠더의 인구학적 규모와 요구를 파악하여 국가정책 수립에 반영할 필요가 있으며, 트랜스젠더가 정신질환이 아니라는 세계보건기구(WHO) 등의 판단을 존중하고 이를 한국표준질병, 사인분류에 반영하여 트랜스젠더를 사회적 낙인으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국가승인통계조사 등에 성별 정체성 등과 관련한 조사항목을 추가하는 것은 개인정보보호 및 조사의 실효성 측면에서 상당한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여 당장 실행하기 어렵다는 데는 동의하나,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적 소수자의 실태와 요구를 파악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며 권고 불수용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했습니다.
인권위는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거나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거듭 밝히면서, 국가의 각종 정책에서 사회적 소수 집단이 배제되는 등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해당 집단의 규모와 요구를 파악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국가승인통계란?
국가승인통계란, 통계작성기관(행정부 각 부처)에서 통계법 제17조에 따라 통계청에 신청해 각종 정책의 수립과 평가 또는 다른 통계의 작성 등에 활용되는 통계를 말하는데, 법에서는 지정통계라고 이야기합니다. (국가법령정보센터)
인권위는 국가의 여러 통계에 성별 정체성 등 성소수자 실태 파악에 도움이 되는 항목을 추가하라고 한 것인데, 이에 대해 통계청에서는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이런 항목이 없으니 실태조사를 해봐야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우선 대답을 하고, 현재 진행하는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사생활 침해 우려가 있는 조사항목에 대해 응답자들의 응답 거부가 증가하고 있으니, 사회적 합의, 현장조사 가능성, 조사 불응 등을 고려하여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는 2021년 1월 29일, 칼럼을 통해 “성소수자들의 사생활 침해를 막기 위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면서, 이와 관련해 사회적 낙인처럼 정신장애로 분류하는 통계는 사실상 장기간 내버려두겠다는 모순된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라고 말하며 정부 부처들의 권고 불수용을 비판했습니다. 김 교수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외된 집단이 국가 통계에 포함된다는 것은 ‘국가의 보호’라는 우산 아래로 들어가는 첫 단계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소수자는 우리나라 국가 통계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집단이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집단이기에 이들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이들에게 낙인이 되는 통계는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숫자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국가가 만드는 통계는 존재의 의미를 바꿀 수 있다. (한겨레.2023.01.29.)
트랜스젠더를 의미하는 성전환증은 여전히 통계청의 표준질병분류(KCD)에 정신장애 중 하나로 들어있습니다.
즉, 통계청은 성소수자의 의료 서비스나 가정의 유지, 복지 등에 필요한 성소수자 통계는 거부하면서 성소수자를 질병으로 다루는 통계는 유지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생활 침해 우려
하지만 성소수자와 관련된 통계 항목을 신설하는 것이 성소수자의 입장에서 오롯이 반갑기만 한 일은 아닙니다. 아직도 한국 사회에는 성소수자의 존재를 매우 가시적으로 거부하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성소수자에 대해 거론하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분위기가 있는 와중에,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밝혔을 때 생길 수 있는 나쁜 반응에 대한 우려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2017년에는 한국기독군인연합회 회장이기도 했던 장준규 육군참모총장이 군대 내에서 동성애를 색출해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군사법원이 실제로 모 대위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한 사례가 있었죠. (경향신문.2017.05.24.) 이에 대해 외신에서는 한국 군대를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습니다만, 한국의 보수 개신교계에서는 이에 대한 비판을 동성애 조장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CNN: 한국 군대의 '소도미 법'은 사라져야 한다 South Korea’s military ‘sodomy law’ should go. (CNN.2017.05.01.)
4월에 밝혀진 한국군의 동성애 남성 복무자에 대한 탄압은 동성애자 군인들과 잠재적인 징집자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An alleged crackdown by the South Korean army on gay male service members, which came to light in April, is striking fear into gay soldiers and potential conscripts.
크리스천투데이: 자식이 군대서 동성 추행·폭행 당할까 노심초사 (크리스천투데이.2017.04.16.)
군인권센터와 성소수자단체는 억지 버리고 군대 동성애 비호·조장치 말라!
아직도 간간히 군대 내에서 동성애자를 색출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고, 재작년에는 변희수 하사 사건도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의료 현장에서, 군대에서, 행정과 형사사법의 현장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무시가 만연해 있는 지금, 국가가 성소수자에 관한 통계를 만든다고 하면 우려스러운 마음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조사를 했을 때, 성소수자들이 솔직하게 응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있구요.
하지만, 내가 더 편하기 위해, 내 기분이 더 편하기 위해 내가 보기에 불편한 존재들을 치우고 안 보려고 하는 사회가 과연 옳은 사회일까요? 상투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런 사회에서 모든 불편한 존재를 치우고 나면, 그 다음으로 청소될 대상은 당신일 수도 있습니다.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함부로 밝히지 않는 것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사회 각영역에서 아직도 여성의 참여가 부족한 것은 여성들이 참여를 원치 않아서가 아니라 사회가 여성들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길에 장애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장애인들이 나가는 걸 싫어해서가 아니라 밖에 나갈 수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로 이지(李贄, 1527~1602)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호가 탁오(卓吾)이기 때문에 보통은 이탁오라고 부릅니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일어나서 7년 동안 벌어졌으니까 대충 어느 정도 시대에 살았는지 가늠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54세까지 각 지방의 하급관리를 전전하며 살았는데 평생 중앙에서 탄핵을 받았습니다. 기인이었거든요.
이탁오가 관직에서 은퇴한 후, 여성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관청에 구속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명나라 부자들의 고급 취미 중 하나가 학자나 문인, 화가 등의 스폰서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탁오 역시 부자 스폰들이 보석금을 내준 덕분에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이탁오가 감옥에서 나온 후, 스폰 중 한명이 이탁오에게 말했습니다.
“여자들은 가르쳐봤자 선천적으로 소견이 좁아서 한계가 있어요. 거, 다 아시는 양반이 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이탁오는 이에 대해 <여인은 도를 배우기에 소견이 짧다는 말에 대한 대답(答以女人學道爲見短書)>이라는 글을 지어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자가 소견이 짧다구요? 그 이유를 알려드리죠. 여자를 천년 동안 안방에 가둬 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진짜 소견이 짧은 사람이란, 그저 길거리에 떠도는 이야기와 시정잡배들의 말을 듣고 마음에 새기지만, 넓은 견식을 지닌 자는 대인(大人)을 진정으로 깊이 두려워할 줄 알고, 감히 성스러운 말을 모욕하지 않으며, 세속에 떠도는 누굴 미워하고 누굴 좋아한다는 말에 현혹되지도 않습니다. (중략) 공께서 넓은 견식을 지닐 수 있길 바랍니다. 만약 나는 시정잡배들과 토론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그 이후에 대해선 알 수 없습니다.
短見者祗聽得街談巷議市井小兒之語、而遠見則能深畏乎大人、不敢侮于聖言、更不惑於流俗憎愛之口也。 (中略) 願公師其遠見可也。若曰待吾與市井小兒輩商之、則吾不能知矣。
그리고 이탁오는 모든 스폰이 끊깁니다. 아끼던 여성 제자는 여자가 공부를 했다는 이유로 세상의 비난을 받고 스승이 구속되자 자살을 합니다. 이탁오의 부인은 이미 이전에 병으로 죽었고요. 가족도 없고, 제자들은 죽거나 흩어지고, 경제난까지 겹치자 이탁오는 정신질환을 앓다가 3년 후 스스로 면도칼로 목을 찌르고 자살을 합니다. 향년 76세.
저는 많은 분들이 넓은 견식을 지닐 수 있길 바랍니다.
성소수자 가시화
정부가 통계를 통해 성소수자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은 국가가 성소수자에게 ‘국가는 안전하다’, ‘국가는 성소수자들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는 신호를 주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존엄과 가치, 행복과 인권, 평등과 안전을 보장할 의무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한국 사회도 성소수자를 비롯한 소수자들이 안전과 행복을 느끼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위한 첫걸음이 무산되어 한국 사회가 모두의 안전과 평등을 이룩할 수 있는 기회가 늦춰진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코멘트
1본문에 나온 인권위 권고사항과 해당 부처들의 대답에서 사생활 침해 항목이 있어서, 당사자들을 배려하려는건가? 싶었는데요. 실상 대응은 모순적이었다는게 느껴지네요.
국가의 역할은 단순히 통계를 수집하는데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하면 시민이 더 건강할 수 있고, 건강 상태를 새롭게 추적해야하는 그룹이 생기면 접근 방법을 바꿔야지요. 차별을 경험하는 대상은 실제로 더 아프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들에 대한 긍정적인 접근이 조속히 이뤄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