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피스모모의 대안언론 '더슬래시 Theslash.online' 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어떤 귀여움 앞에서 멈칫
‘귀여운 게 세상을 구한다’는 말은 이 시대의 속담이 되었다고나 할까. 세상이 유머와 다정함, 순수함 같은 것을 점점 잃어가는 요즘, ‘귀여운 것’은 사람들이 절대 잃고 싶지 않은 마지막 ‘숨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도 기계처럼 강하고 똑똑하고 효율이 뛰어나야 살아남는 시대, 기계처럼 반듯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볼펜 꼭지에, 열쇠고리에, 손톱에 그려 넣은 그림에, 누구도 보지 않는 잠옷에, 마치 참을 수 없이 삐져나온 듯한 크고 작은 귀여움을 간직하며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귀여운 건 못 잃어.’
나도 귀여운 걸 못 참고 못 잃는 사람으로서, 귀여운 건 거의 옳고 이롭다고 생각한다. 사랑스러워야 귀엽기 때문에 상대를 향한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시선이 전제되어 있다. 게다가 귀엽다는 생각은 너그럽다. 서투름과 실수도 안아주고 사랑스럽게 여겨주는 말이니까. 나는 첫 출산을 시작으로 쉼 없는 육아와 함께 따라온 쉴 새 없는 귀여움을 누리며 꽤 ‘평화’라는 말 가까이 살고 있다고 느꼈다. 아이의 존재는 평화 아닌 것을 떠올리기 힘들게 사랑과 평화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어떤 ‘귀여움’ 앞에서 멈칫 걸음을 멈췄다. 결코 멈춰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가 태어난 지 8개월 무렵, 아기가 들을 만한 수업이 있을까 하고 인근에서 열리는 문화센터 강좌를 검색하던 중 이런 강좌를 발견했다. <오감통합놀이 - 군인놀이> 이 어색한 단어 조합에도 놀랐는데, 사실 더 충격받았던 것은 이 강좌를 들을 수 있는 나이였다. 생후 4개월부터 25개월의 아기들이 이 강좌의 대상이었다.
이제 고작 8개월인 우리 아이도 그랬지만, 4개월이라면 이제 막 100일을 지나 뒤집기를 시도하거나 빨라도 배밀이를 하고 있을 아기가 문화센터에서 ‘군인놀이’ 강좌를 수강한다니. 그 모습을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떤 내용으로 진행될까 궁금했지만 수강신청을 하지는 않았다.
그 귀여움은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몇 개월 뒤, 동네 지인의 SNS에 마침 이 수업의 사진 후기가 올라왔다. 그때 지인의 아기는 6개월이었는데, 사진 속 아기는 군복 코스튬을 입고 앉아 있었다. 아기의 주변에는 총 모양의 플라스틱 장난감이 수두룩하게 널려 있었다. 정말 궁금했지만, 지인에게는 차마 군인놀이 수업을 하는 동안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장난감 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을 꺼내 볼 용기가 안 났다. 대화의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자꾸 그런 걸 진지하게 파고들고 물어보면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안 들까 봐 참았던 것 같다.
나는 그 후로 계속 왜 이 귀여움이 괜찮지 않은지 스스로 설명할 말을 찾고 싶었다. 이건 그저 놀이일 뿐이고 진짜도 아닌 가짜니까, 마냥 귀엽게 볼 수는 없는지 따져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순 없었다. 이 귀여움은 괜찮지 않았다.
포털사이트에 ‘군인 놀이’를 검색하면 유아에게 행해지는 수많은 군대 컨셉의 유아교육 프로그램과 행사 후기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초등학생 병영 체험 캠프는 오래전부터 들어봤지만, 아예 어린이집에서도 행사업체를 통해 교실을 군대나 전쟁터처럼 꾸며 체험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사진 속 아이들은 ‘충성!’을 하고 있거나, 엎드려서 총을 겨누고 있거나, 내무반처럼 꾸며진 곳에 군용 모포를 덮고 있기도 했다.
‘오감 통합 발달’이니 ‘직업 체험’이니 하는 이름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어른들의 욕심을 채우는 인형 놀이에 그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만 1세 미만 영아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은 더욱 그렇다. 유아 문화 강좌나 교육 프로그램이 이처럼 주로 겉으로 보이는 것 중심으로 기획되고, 그에 비해 소재와 내용을 아이들과 함께할 때 ‘어떻게’ 다룰 것인지 신중히 고민하지 않는 모습이 안타깝다. 그 결과 아이들은 인형처럼 수동적인 존재, 납작한 ‘대상’이 되고 만다. 어른들은 적어도 이것이 아이들의 발달이나 교육을 위한 것인 척 포장하는 거짓말은 멈춰야 한다.
평화의 정신을 흡수하기를!
마리아 몬테소리는 만 6세 이하의 유아들이 ‘흡수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이 시기 환경에 놓여진 것들을 이용해 정신의 근육을 만든다고 했다. 이 시간을 통과한 아이들에겐 어떤 정신이 남을까? 아이들이 진정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무엇을 느끼고 흡수하고 있는지 살피는 일이 늘 최우선시 되었으면 한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아이들의 건강한 발달을 위해서나 아이들이 살아갈 사회를 위해서라도 아이들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폭력적인 문화가 아니라 평화의 지혜를 흡수할 수 있는 환경으로 말이다. 적이 아니라 친구를 만드는 법을 배우게 하고,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로 이해하는 법을 흡수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너그러운 마음씨와 사려 깊은 태도를 흡수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은 아무리 해도 기쁜 고민이다.
‘사이좋게 지내라’ 가르치면서 무기 체험을 부추기는 어른들
지난 2023년 10월, 역대급 규모라고 홍보되었던 서울 ADEX에 갔다가 우연히 본 장면들도 내게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무기 전시회인 그곳에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 단위 관람객이 아주 많다는 것부터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곳에서 어느 부모는 자식으로 보이는 어린이에게 “더 진짜같이 해야지!”라며 군인다운 사격 포즈를 강요해 사진을 찍기도 했고, 전시장 곳곳에서는 부모들이 먼저 무기 체험을 적극 부추기고 있었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유아들에게 군인놀이를 시켜주겠다는 것도 이처럼 무기 체험, 전쟁 체험을 어른들이 나서서 부추기는 꼴이다.
우리는 전쟁을 떠올릴 때, 이상하리만큼 훌륭하고 웅장하다는 느낌만을 표지로 기억한다. 전쟁 영웅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은 오랜 시간 주입되어 우리 가슴 속에 남아있다. 그 표지를 넘겨보면 소박하게 아름다운 우리 삶의 모든 장면이 핏빛으로 물들고, 생생히 웃던 이웃들이 거리에 시체가 되어 누워있고, 온 동네가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차는 끔찍한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는 어쩐 일인지 그런 이야기를 전쟁의 표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쟁+놀이가 가능한 걸까?
만약 지금 우리나라에서, 옆 동네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면 전쟁이 놀이가 될 때, 귀엽고 재미있을 수 있을까? 전쟁은 일어나고 있지만 그게 우리나라가 아니라면, 우리 동네가 아니라면 아이들의 전쟁놀이는 귀엽고 재미있을까? 아이들이 점점 더 진짜 같은 무기 모형으로 더 진짜 같은 군인 흉내를 내면서 논다면, 자라면서도 계속 그렇게 놀고자 한다면, 아무도 그 놀이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면, 심지어 어른들이 멋있다며 부추긴다면? 그 놀이가 끝내 진짜 현실에서 재현되지는 않을지 두려움은 더욱 커진다.
내 아이들이 장난감 총을 사달라고 하면 어떻게 이야기를 나눌 지 미리 그 대답을 고민해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다. 무기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개발된 무시무시한 도구라고, 전쟁은 상대를 힘으로 때려부수고 죽이며 싸우는 일이라고, 사람답지 못한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폭력행위라고. 지금 어린이들이 들고 있는 장난감 총, 칼이 비록 진짜는 아니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 폭력에 익숙해지게 하고 상대를 향한 냉소와 경멸을 자라게 한다는 인식이 보편상식이 되기를 꿈꾼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늘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지.’, ‘다 내 생각과 같을 수는 없어. 친구는 나랑 다를 수 있어.’, ‘친구를, 사람을 아프게 하면 안 돼.’와 같은 지극히 평범한 상식을 가르친다. 그런데 어째서 군대의 폭력은 괜찮을까? 어째서 훌륭하고 대단한 어른들이 잔뜩 모인 ‘국가’씩이나 되어서 상대를 아프게 하고, 파괴해서 이기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의아할 법도 하다.
익숙한 것도 다시 보자!평화의 속삭임에 춤추는 교육을 위해서라면
언어의 변화가 정신의 변화에도 크게 기여한다고 믿는 나로서는 ‘뚝, 조용히 해.’, ‘혼난다. 그만.’, ‘말 안들어?’처럼 짧고 무서운 명령과 협박으로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을 만나면 마치 아이처럼 흠칫 놀라곤 한다.
그보다는 나은 버전이긴 하지만 우리 집에선 아기가 울 때 어른들이 “아이고 누가 그랬어! 우리 XX이 누가 그랬어!” 하면서 탓할 대상을 찾는다. 그러면서 아기는 울음을 그친다. 때로 어른들은 울음의 원인이 된 사람이나 사물을 “때찌!”하며 대신 응징해 주기도 한다. 나도 이런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자랐지만, 이 사소한 장면조차 반복해서 마주하니 불편하게 느껴졌다.
‘누가 그런지 중요한 상황도 아닌데 왜 자꾸 누가 그랬는지 찾지?’, ‘그냥 서러운 마음, 놀란 마음을 달래주기만 하면 안 되나?’ 그게 우리도 모르게 응징과 복수를 가르치는 것 같았다고 하면 비약일까? 다만 난 아이를 빨리 달래기 위해 그렇게 단순한 방법을 쓰는 것이 아이에게 최선의 도움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이렇게까지 사소한 것으로도 고민을 거듭하며 주변을 피곤하게 하진 않을까 미안한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사랑의 힘을 더욱 굳게 믿으며 살아가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아마 계속 묻는 일을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이거 괜찮은 걸까?’, ‘이거 당연한 걸까?’, ‘예전엔 몰라서 그랬지만, 이제 더 좋은 방법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을까?’
앞으로도 아이와 함께, 평화의 속삭임에 귀를 쫑긋 세우고 평화의 리듬에 맞추어 나비처럼 나풀나풀, 지렁이처럼 느릿느릿, 콩처럼 콩콩콩, 쌀처럼 쌀쌀쌀 신나게 웃기게 귀엽게 춤추며 살아가고 싶다. 기후와 정치와 농업 등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절망으로 질주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평화에의 의지를 굽힐 수가 없다. 우리 귀여운 아이들의 맑고 환한 웃음을 보라. 무슨 변명을 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지켜야 할 평화의 표지가 바로 이 얼굴들 아닌가.
/
푸른
지리산을 품은 산청에서 다정한 이웃들과 많이 웃으며 산다.
어린이, 농촌, 평화, 교육에 대해 늘 생각한다.
엄마로 태어난 지 3년차로, 두 아이와 함께 날마다 새롭게 세상을 배우고 있다.
코멘트
9연주, 혜선, 짠미, jay_kim, 도란, goodbookkr님 코멘트와 공감 너무 감사드려요.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강요'하는 귀여운 군인놀이가 참 섬뜩하지요.
오늘은님, "한국은 유달리 '우리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나라'라는 표현으로 북한을 적대시 하는데 활용하거나 군사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 이라고 말씀주신 것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전쟁놀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오는 것도 있지만 한국 사회가 군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바꿔나갔으면 하는데요. 한국은 유달리 '우리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나라'라는 표현으로 북한을 적대시 하는데 활용하거나 군사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군사력이 아니라 '종전'과 '평화'를 만들면 해결되는 일인데도 말이죠. 군대라는 존재는 최후의 수단인 전쟁을 가정해서 유지되는 조직이고,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을 대비하는 것이지 최선의 수단이 되진 않는다고 봅니다.
90년대생인 저는 어릴때 ‘지옥탈출‘, ’경찰과도둑‘ 같은 놀이를 주로 했는데.. 요즘은 ’군인놀이‘군요.. 뭐랄까 이 반평화에대한 무감각이 좀 놀랍기도 하고 그런 컨셉이 ’귀엽게’ 소비되는 사회라는게 충격적이네요.
전쟁터처럼 꾸며서 체험 행사를 하기까지 하다니 놀랍네요
"전쟁+놀이가 가능한 걸까?" 라는 말에 정신이 확 차려지네요. 정기적으로 군 페스티벌이 열리는걸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도 아이들이 많이 방문하더라구요. 사이좋게 지내는 법에 대한 교육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헉 생후 4개월부터 25개월 사이 갓난(...)아기들을 대상으로 문화센터에서 '군인놀이'를 한다니 저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군인놀이'라는 건 연령무관 충격이겠지만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치는지 생각하고 교육을 짜기를 바랍니다.
정말 공감합니다!! 저도 ‘무기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개발된 무시무시한 도구라고, 전쟁은 상대를 힘으로 때려부수고 죽이며 싸우는 일이라고’ 꼭 기억해두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