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말할 자격

202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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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커먼즈의 관점에서 현실을 조망하는 대안언론, 더슬래시

*이 글은 피스모모의 대안언론 '더슬래시 Theslash.online' 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10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공병 출신의 공학도 친구와 ‘지뢰 제거’를 놓고 격론을 벌이게 됐죠. 마침 저는 그 전에 모 시민단체에서 민북지역을 조사하는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보고서의 대인지뢰 파트 작성을 담당했던 터였습니다. 그는 지뢰 제거가 매우 위험한데다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면서 M14(일명 ‘발목지뢰’) 제거는 불가능하다, 민북지역 지뢰 제거는 300년 400년이 걸린다는 한국군의 입장을 옹호했습니다. 저는 지뢰 제거가 위험하고 복잡한 일은 맞지만, 한국군의 방식은 효율적이지도 않고 국제적인 수준과 동떨어져 있다고 반박했어요. 연구 당시 인터뷰했던 지뢰 제거 사업가의 해외 지뢰 제거 사례도 이야기해 보았지만, 제 말은 그에게 하나도 가닿지 못했습니다. 저는 군대에 간 적도, 갈 일도 없는 영원한 ‘미필’ 여자였으니까요. 그는 공병 출신인 자신을 앞에 두고 어린 미필 여성인 제가 지뢰 제거에 대한 견해를 내세우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그때의 격론은 으레 있었던 술자리 갑론을박 중의 하나로 지나갔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지금도 잊히지 않고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꼭 그만 그런 반응을 했던 것도 아닙니다. 제가 군인이 어쩌고, 안보가 어쩌고 하는 말을 꺼내면, 그것이 말이든 글이든 혹은 눈빛이나 표정으로도 ‘흐린 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종종 느낄 수 있었거든요. ‘군대도 안 갔다 와본 게’로 시작되는 그와 같은 반응은 이해하기 싫으면서도 또 한편 이해가 되기도 했어요. 저는 그 와중에 ‘안 간 건 사실이지 암’ 하는 사람이었거든요. 대신 그 뒤에 꼭 한 마디를 덧붙이는 거죠. ‘안 갔는데 그래서 뭐? 군대 안 가면 아무 말도 하면 안 되나? 사람들이 꼭 국가대표만큼 운동 잘해서 선수들 욕하고 그러나?’ 하고요.  

그럼에도 제 경험은 아주 작은 에피소드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군대, 국방, 안보, 하여간 무엇이든 ‘나라 지키기’ 같은 환상과 엉키는 순간, 여성들의 목소리는 터무니없이 작아지곤 하거든요. 지난 5월 임기를 마친 제21대 국회에서 여성의원 비율은 19%(300명 중 57명)였는데요. 21대 국회 임기 종료일을 기준으로 국방위원회는 정원 17인 중 여성의원이 단 1명(5.9%), 외교통일위원회는 정원 21인 중 여성의원이 마찬가지로 단 1명(4.8%)에 불과했습니다. 국정원을 다루는 정보위원회에는 여성의원이 전무했고요. 전체 여성의원 비율도 높지 않은데, 국방이나 외교 문제에선 한참 더 낮아지는 거죠.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인 한국은 여성 안보 전문가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은 이미 전 세계 전문가들 사이에도 익히 알려진 것 같습니다(BBC, 2020/01/08)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군대를 비판하고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에서조차 여성들의 존재는 지워지기 일쑤였습니다. 신재욱(2024)의 연구에서 1987~1993년 사이 군 민주화(군인·전경 양심선언) 운동에 동참했던 여성 활동가 신경아(가명)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양심선언했던 당사자들의 경우,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내가 그냥 조력자였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이 운동을 끌고 갈 것인지 이런 걸 함께 협의해나가야 하는 동지라고 생각을 안 한 거지. 나를. 그러다 보니까 본인들이 출소를 했다거나 복학을 하고 졸업 이후에 자기 전망을 세워 나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배제돼 있었던 거죠. 마지막에 내가 운동을 계속해 나가야 할 전망이 안 보인다고 결론을 내렸던 게, 그러한 관계가 형성이 안 되다 보니. … 내가 여자이다 보니 갖는, 본인들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나를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고 배제되는.       ―‘신경아 2차 인터뷰’ 중, 신재욱(2024: 78)

 신재욱은 신경아가 당시 함께했던 동료들로부터 ‘활동에 대해 가장 잘 안다’라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해나가면서 동료가 아닌 ‘조력자’로서만 대우받았다고 느끼게 된 것은 분명히 군 문제에 있어 암묵적으로 젠더 위계가 작동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군 문제에서 작동하는 젠더 위계는 군 안팎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죠.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뒤 학생회 활동의 일환으로 대체복무제 입법 운동에 참여했던 장박가람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로 ‘군대’ 문제를 둘러싼 강고한 성별/젠더의 벽을 보여줍니다.

제가 1학년 때 전학협(전국학생회협의회)에서 ‘대체복무제 국회 입법을 위한 전국 10만인 서명운동’을 했어요. 그래서 각 대학의 전학협 활동을 하는 학생들이 학내에서 서명을 받았는데, 제 기억으로는 저희 학교가 서명을 제일 많이 받았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공격도 제일 많이 받았죠. 우리가 서명을 제일 많이 받아서가 아니라 ‘이화여대’라서. / … ‘햏자*’를 주축으로 해서 사이버 테러가 일어난 거예요. 그때 사람들이 공격할 좌표를 찍었는데요. 어떤 사람들이 병역거부연대회의에 병역거부 관련된 사람들은 다 모여 있으니 여기에도 좌표를 찍자고 주장하는 가운데 ‘햏자’들은 “아니다. 그건 필요 없고 이 학교를 좌표 찍어야 된다”라고 주장했어요. 용납할 수 없었던 거죠.
*편집자주: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서 활동하던 그룹. 병역거부 운동에 소위 '좌표'를 찍고 공격적으로 악성댓글을 달았다.
 ―“페미니스트, 평화활동가, 평화교육 연구자 장박가람” 전쟁없는세상(2022: 26)

 장박가람은 당시 이화여대 구성원들을 향한 사이버 불링이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말합니다. 총학생회 홈페이지를 다운시키려 들고, 학교 구성원을 위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난입하고, 사이버 성폭력과 ‘신상 털기’가 잇따른 까닭에 그 자신도 “공포에 떨고 있었”다고 해요. 이 뒤틀린 분노는 이미 2000년 군가산점제 폐지 때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죠(엄수아, 2014/02/20).   

병역거부 운동의 초기부터 활동해 온 최정민은 운동 초반 “내내 ‘노’라는 소리만 맨날 들었”다고 말합니다. 초청하는 쪽의 거부로 어떤 토론회나 지면에도 글을 쓰거나 토론자로 나갈 수 없었다고 해요. 여성이라는 이유로요. 이에 따라붙은 핑계는 “여성이 징병제도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 토론이 어떻게 징병제도를 개선할까로 생산적으로 가지 않고 엉뚱한 산으로 간다”는 거였죠. 그는 당시의 경험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어떤 군사적인 해법이라고 하는 게 힘이 강한 남성이 힘이 약한 여성을 보호해 준다, 이 구도가 되는 거잖아요. 근데 이 구도가 확립이 되려면 내가 보호해 준 대상자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이 구도가 확립이 되는 거지 이 보호해 준 대상이 갑자기 어느 날 내가 보호받는 이 시스템은 별로인 것 같아, 이렇게 얘기를 하는 순간 그 구도가 깨지니까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한국 병역거부운동의 시작 최정민,” 전쟁없는세상(2022: 11)

여성들이 군대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때, 여성들에게 돌아온 반응은 하나같이 비슷했습니다. ‘여자가 왜 설치냐’, ‘암탉이 우니 시끄럽다’ 따위의 반응부터 ‘여자가 있어서 성폭행이 발생하니 여자를 없애자’는 기상천외(?)한 반응까지(이대학보, 2002/10/07). 당시 대선후보였던 정몽준은 양심적 병역거부 지지를 밝힌 이화여대 학생 앞에서 “여자는 군대를 안 가는데 왜 문제인가? 징병제랑 여성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습니다(임세환, 2002/09/28). 한 마디로, 조용히 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거죠. 너는 ‘말할 자격’이 없다고요.  

그렇지만 조용히 하기도, 가만히 있기도 싫습니다. 그보다 누구라도 말하고 누구라도 딴지를 걸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군대도 안 가는 여자는 조용히 해’하고 말하면 마치 ‘군대 가면 말해도 돼’, ‘남자라면 말해도 돼’라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요. 군대에서의 사건 사고, 일상에서의 여러 폭력과 불안전을 지적하는 것은 군대에 다녀온 남성들에게도 쉽게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 ‘말할 자격’의 장벽을 풀기 위해선 입대를 앞둔 남자도, 군대에 있는 여자도, 군대에 다녀온 트랜스젠더도 모두 다 떠들 수 있어야 합니다. 특급전사, 도움배려병사(관심병사), 방위, 공익, 초급간부, 병사, 병역거부자, 병역면제자 그리고 군대와 가장 멀어 보이는 비군인 여자까지도 자유롭게 참견하는 세계가 되어야 해요.  

그렇게 되면 징병제도를 깊이 고민해야만 할 겁니다. 군대 내 폭력이나 위계에 의한 성폭력도 대충 넘어갈 수 없게 될 거예요. 군인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군대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국방과 안보는 어떻게 성취되는 것인지, 국가는 시민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 그 반대는 무엇인지, 제대로 고민하고 설득해야만 하겠죠. 그런 뒤라면 SNS를 돌아다니다 벽 곳곳마다 곰팡이가 가득 핀 초급간부 관사 영상을 보지 않아도 될 겁니다. 초과근무수당이나 당직비가 입금되지 않아 가족의 생계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직업군인의 하소연을 볼 일도 없어지겠죠. 부당한 폭력과 부조리에 노출된 군인들의 사연도 더는 쌓이지 않을 테고요. “3.8일에 한 명꼴로 군인이 죽는다”는 통계도(나경희, 2024/06/18), “입대 10일차 ‘얼차려 사망’ 막을 기회 22번 있었다”하는 뒤늦은 탄식도(심우삼, 2024/06/06)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군인은 국가가 필요할 때 군말 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라는 비겁하고 치졸한 변명 따위를 듣지 않아도 될 거고요(세계일보, 2024/06/11).  

 그러니까 저는 ‘말할 자격’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하려고 합니다. 다치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소외되는 사람도 없어질 때까지요.

  

참고문헌

김형은. “북한과 한반도 평화를 분석하는 여성 안보 전문가들의 이야기,” (BBC, 2020. 1. 8.).
나경희. “3.8일에 한 명꼴로 군인이 죽는다,” (시사IN, 2024. 6. 18.).
세계일보. “임성근 전 사단장 ‘탄원서’, "군인이란 군말 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 (세계일보, 2024. 6. 11.).
신재욱(2024). “군 민주화 운동가들의 정체화 과정 연구: 1987-1993 군인·전경 양심선언을 중심으로,” 성공회대학교 국제문화연구학 석사학위논문.
심우삼. “입대 10일차 ‘얼차려 사망’ 막을 기회 22번 있었다,” (한겨레, 2024. 6. 6.).
엄수아. “군가산점제 위헌판결, 불붙은 논쟁의 시작,” (여성신문, 2014. 2. 20.).
이대학보. “병역거부지지, 이화는 남성의 적?,” (2002. 10. 7.).
임세환. “"군대안가는 여자가 왜 거부운동을..",” (오마이뉴스, 2002. 09. 28.).
전쟁없는세상(2022). 『2022 병역거부운동 여성활동가 인터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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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엘림
언론정보학과 북한학에 발을 담그고 미디어, 사회, 젠더, 통일, 평화 같은 것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평화를 더 배워보겠다며 시작한 국제정치학 공부 중에 전쟁과 젠더의 교차에 눈길이 머무르면서, 6.25 전쟁기 여성의 전쟁 경험을 연구했다. 피스모모 평화페미니즘 연구소와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웹진 <다양성+Asia>에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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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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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코멘트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여전히 사회에서 예민한 이슈로 받아들여지는 징병 문제에 대한 의견을 안전하게 나눌 수 있는 몇 안되는 공간이네요! 그 '00전문가'라는 것은 어떤 허상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생각해보게 되어요.

사회문제를 말하는데 있어서 '당사자'의 말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말이 당사자가 아니면 말해서는 안된다는 말로 이해되고 심지어 비당사자들을 당사자의 아래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이라면 심각한 문제상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 특히 이 경우는 비당사자로 여겨지는 여성, 그리고 군대를 갔다오지 않은 모든 이들이 전체 사회구조 차원에서 다른 의미의 핵심 당사자가 된다는 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사자의 말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비당사자들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가운데에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주목하는 정도로 중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문제는 여러 차원에서 모두가 당사자이고 자유롭게 말해야만 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내가 당한게 이정도인데, 안당해본 사람은 발언권 자체가 없어' 정도의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여성 간부들도 무시의 대상이 되기 마련인데요.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아는 인식이 기저에 강하게 깔려있기 때문에 발행하는 일 같습니다. 군대를 특정 성별이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것이 아닌 국가의 시스템으로서 대안을 논의할 수 있는 인식지 퍼지면 좋겠네요.

군대를 경험해본 사람만 군대를 논해서 좋은 군대가 된다면 지금 한국 군대는 왜 이 모양인 걸까요? 군대를 경험해본 사람만 제도에 개입하는 게 왜 틀린 주장인지는 사실 현실에서 너무 많이 봐왔습니다. 다른 분야에도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모를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로 여성 전문가들이 무시받는 일이 많아 보입니다. 이제 한국도 좀 바뀔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군대 이야기를 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어죠. 다녀왔냐 아니냐로 모든 논쟁을 종결시키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래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