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피스모모의 대안언론 '더슬래시 Theslash.online' 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 김진선(피스모모) , この記事は日本語でも読むことができます(クリック)。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 완아이화(万爱花, Wan Aihua)님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13년 여름이었다. 나는 당시 대학원생으로, 중국 산시성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의 대일 재판 투쟁을 지원해 온,‘산시성일본군성폭력실태를밝히는모임’의 이시다 요네코(石田米子)등과 동행하고 있었다.
글 머리에 밝혀두고 싶다.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들 중에는 일본군 ‘위안부’로 불리는 것을 극구 거부해 온 사람들이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위안부’라는 말이 일본군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강간을 ‘위안’이라고 부르는 기만과 모욕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다수가 식민지 제도 아래의 피해자인 한반도나 대만과 침략 전쟁의 전선이 된 중국의 피해 형태가 다르고, 사실상 일본군‘위안부’가 아닌 피해자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위안소 피해 외에 난징 같은 도시를 점령할 때 발생한 대규모 집단 성폭력, 작전행동 속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진 전시강간(포로 성고문 등 포함), 또 위안소가 없는 곳에서 병사들이 현지 여성들을 잡아 개인적으로 강간소를 지어 벌인 성폭행 등 다양한 형태의 피해가 있었다. 일본군의 성폭력은 위안소 바깥으로도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이 확산되는 구조를 갖고 있어 성노예화 이외의 피해도 많았다. 이미 지적되었 듯이 전시 성폭력의 피해자도 여성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완아이화님은 일본군‘위안부’라는 명칭은 2차 피해라고 딱 잘라서 끊임없이 주장해 온 사람이다. 완아이화님을 보면서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들의 재판투쟁이 국제적인 인권운동으로 확장되었고, 이를 통해 생존자들의 권리의식이 회복되고 있으며, 피해자들은 인권운동가로 거듭났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완아이화님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한껏 차려 입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함께 싸워 온 이시다 요네코님의 손을 잡고, 강한 눈빛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일본 정부에는 정의가 없어요.”
”이 투쟁은 당신들이 계속해줘요… 포기하면 일본정부가 가볍게 볼거예요.”
완아이화님은 그로부터 9일 후 숨을 거두었다.
나는 페미니즘을 일본군 성폭력/성노예제의 생존자들로부터 배웠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한국의 할머니들을 비롯해 많은 일본군 성폭력/성노예제 생존자들이 일본에 와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재판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성차별을 비롯한 일본 사회의 차별에 직면했던 내 눈에는 정의를 찾는 피해자들이 무척 눈부시게 보였다.
하지만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가‘우리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나 한일 합의에 의한 화해·치유재단 등으로 시간을 벌고, 피해자를 ‘동정’하는 척 하면서 결코 사죄하지 않는 등 식민지 지배 책임과 침략 전쟁의 책임을 흐리게 하고 있다. 중국 산시성과 하이난섬에서는 모두 4건의 대일 사죄 배상 청구 재판이 벌어졌으나 모든 피해 사실은 인정하는 대신 사죄와 배상 청구는 기각됐다.
산시성 피해자의 대리인을 맡은 일본 변호사는 일본 사회의 사법 상황을 감안하면 100% 이길 수 없는 재판이라고 말했다. 이길 수 있다고 희망을 심어주어, 원고를 속이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 했다. 그래서‘산시성일본군성폭력실태를밝히는모임’의 이시다 요네코 등은 제소 전에 원고를 방문해 예상되는 결과를 말했다. 왕가이허(王改荷)라는 피해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이 잦아들자 왕가이허님은“出口气(화풀이)”라고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가슴 속의 한을 토해내기 위해 재판을 한다고, 그만한 일이 있었는데 말하지 않고 죽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중국 농촌의 피해자들이 일본에 가서 재판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피해자들 대부분 중국 표준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고,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도 울퉁불퉁한 길을 하루종일 가야 할 정도로 오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원고들은 이길 가망이 없는 재판을 이어가며 “당신들이 계속해 주세요”라며 돌아가셨다.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와의 만남을 통해 스스로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가지면서, 내가 사는 사회의 차별 구조와 역사를 자각하게 되었다. 산시성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 장시엔투(张先兎)님은 1992년 주중국 일본대사관에 피해를 호소한 탄원서를 내고 배상금을 요구한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장시엔투님의 남편은 일본군에 납치된 그를 되찾기 위해 빚을 내 몸값을 지불했다.‘탄원서’에는 그 빚을 1992년이 되어서도 다 갚지 못했다고 써있다. 가난한 중국 농촌에 있는 피해자의 집을 찾았을 때 일본군의 손자인 내가 어떤 역사의 토대 에서 무엇을 누려왔는지 되묻지 않고서는 페미니스트라고 자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바로 지난달, 산시성 친구로부터 과거 대일소송을 제기한 원고들(현재 모두 고인이 되신)의 유족들이 한국 할머니들이 쟁취한 지난해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주권 면제’를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 배상을 명령한 것)을 알고 중국 산시성 고급인민법원에 일본 정부를 제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학순님이 나선 이래 30년에 걸쳐 사회운동이 두텁게 거듭된 한국과 달리 중국 사법과 사회 안에서는 이 소송이 여러모로 매우 어렵다. 일본군 성폭력 문제에 정통한 중국인 전문가나 변호사도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재판이다. 완아이화님의 딸 리라디(李拉弟)님은‘우리가 시작한 재판투쟁이 이미 돌아가신 어르신들(어머니들)을 만족시킬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산시성 유족의 소장은 아직까지 중국 법원에서 수리되지 않고 있다. 국가와의 싸움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를 처음 만났을 때, 대학생이었던 내가 죽는 것도 기다릴 수 있다. 그런 상대와 싸우는 방법은 사회를 바꾸려는 긴 무명인들의 행렬에 줄을 서서 살아 있는 동안 열심히 운동하고, 나보다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건네는 것뿐이다.
‘나에게 용기를 준 여러분들에게 살아 있는 동안 정의를 돌려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도 살아있는 한 계속 싸워 나갈 것이다. 늘 희망을 붙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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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타 케이코
젠더 및 사회학 연구자이자 페미제미&카페('젠더와 교차성에 관한 독립 페미니스트 세미나 및 페미니즘 예술 공연 카페'라는 뜻)의 이사, 중국어-일본어 통역 및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연구 분야는 낙태, 일본군 전시 성폭력 생존자 명예 회복 운동, 동아시아의 페미니즘 운동 등이다. '해시태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동아시아의 페미니스트 운동(오츠키 출판, 2022)'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코멘트
1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나타나고 있었군요...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계속 생각을 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