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위키와 집단지성

202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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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 연구자. 일어/중국어 교육 및 번역. => 돈 되는 일은 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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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번역하고 공부하다보면 특정 인물의 외국어 표기, 생몰년, 사건의 발생 연도 같은 것을 찾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자주 하게 된다. 내가 궁금한 것을 구글에 검색하면 가장 먼저 뜨는 것은 나무위키와 위키피디아다. 그러면 필요한 정보만 가지고 나오면 되는데 (나도 모르게) 페이지에 들어간 김에 그곳에 적힌 설명을 쭉 읽게 된다. 한국어 위키백과나 나무위키에 올라와 있는 여러 정보 중에는 중국어나 일본어, 영어 위키에 비해 틀린 내용이 많고, 역사나 사상 관련 서술 중에는 일본어/중국어 위키피디아를 번역기에 넣고 돌려서 그냥 올려서 어색한 문장도 많은데, 거기에 더해 서술의 근거가 된 참고문헌을 가지고 오지 않는 바람에 설명이 생략되어 더 이상한 서술이 되어 버린 것들이 많다. 비문이 심각하게 많은 항목들도 있고. 위키피디아/나무위키의 설명을 몇번 읽으며, 위키 시스템에서 진정한 승자는 지식을 많이/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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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가 인기를 끌 때 함께 유행했던 말이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다. 여러 명이 자신의 지식과 지성을 모아 협력하거나 경쟁을 하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때의 집단은 기업이나 이해관계 조직, 군대 같은 기존의 조직과는 다르다. 다양성과 자율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탈중앙적이고 느슨한 집단이다. 좁게는 한 나라에서 넓게는 전세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모아 사고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집단지성은 기존 지식 산업이 가지고 있던 권력에서 벗어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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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시대가 변하면서 지성, 지식, 전문성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변화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이제 더 빠르고 요약된 정보를 얻길 원한다. 실용성이 강한 정보를 원하고 맥락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은 정보는 피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또, 더 이상 문자에서만 지식을 얻으려 하지도 않는다. 많은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 알고 싶은 것을 찾을 때 구글이나 인터넷 사전 대신 유튜브나 틱톡을 검색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미지와 동영상도 지식의 창고가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노하우나 기술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감상이나 편견 같은 것도 지식의 범주 안에 들어와버린 느낌을 받기도 한다. 개인의 감상이나 편견이 지식 안으로 편입될 때엔 늘 ‘다수’의 생각이라거나 ‘상식’, 강한 ‘경향’ 같은 말이 사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나무위키가 그렇다.) 위키를 통해 지식의 벽은 낮아졌을지 모르지만 깊이와 정확성 면에서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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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전문가나 권력자의 말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것이 문제였다. 어떤 사람의 지위가 높거나 높다고 여겨지는 경우,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무조건 신뢰해버리는 문제가 있었다. 이를 논리학에서는 잘못된 권위에 대한 논증(Appeal to unqualified authority)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도 이런 현상은 많다.)

집단지성에 의해 지식이라는 개념이 변화하면서 부정적인 면도 생겨났다.

첫째는 집단사고와 집단지성의 혼용이다. 집단사고는 소수의견이나 갈등을 억압하고 집단이나 사회 내의 의견 일치를 유도하며 비판을 불허하는 것을 말한다. 집단사고는 다수가 선택했으므로 오류가 없다거나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고 만장일치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할 수 있으며 사회적 소수자를 탄압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집단지성이 집단사고로 흐르지 않기 위해선 일단 집단의 크기에 대한 고민도 해야할 것이고, 집단 안에서 일정수 이상의 사람들에게 비판자나 감시자 역할을 배당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위키 구조에서 어떻게 실현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둘째는 전문가에 대한 적대와 불신이다. 기존의 지식인/전문가들이 지나치게 거만했고 사회와 소통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넘어서 지식인/전문가를 경멸하고 조롱하는 태도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서 이런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역사학계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재야사학, 비-강단사학에서는 고대 한국의 영역을 지나치게 넓게 잡거나 한국 민족의 기원을 기원전 5천 년 이전으로 지나치게 높게 잡으면서 이런 주장을 하지 않는 대학 중심의 강단사학, 중고교 역사교육을 친일, 역사왜곡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일부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일부 이공계, 사회과학계 전문가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양새다. 관련 전공자로서 우려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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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지성이 힘을 발휘하려면 편견이 없고 독립적인 개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독립적이라는 말은 ‘권력과 별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국가나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독립적이여야 한다는 의미도 있고, 주위의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태도로부터 독립적이여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다. 이럴 때 타인의 판단을 따라가지 않고 나만의 생각을 가지는 게 얼마나 가능할까? 

집단지성이 잘 작동한다면 (혹은 실제로 존재한다면), 한 사회, 좁게는 특정 집단 내에서 설사 틀린 생각이나 틀린 예측일지라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해야 하며, 이해타산의 측면에서 가장 나쁜 선택이나 윤리적인 측면에서 악하다고 여겨지는 선택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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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인공지능, 집단지성, 이런 것들은 그냥 도구일 뿐이다. 그 자체가 민주적이라거나 합리적일 수도 없고, 영화 <매트릭스>처럼 그것들이 저절로 인간을 지배하는 세계를 만들어갈 것이라는 생각도 내가 봤을 때는 오바다.

지식을 얻고 싶다면 이미 전자화되어 있는 양질의 사전들을 사용하면 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은 것들 말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집단지성이 박학다식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공평하게 주어진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성찰과 반성, 토론을 통해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려는 과정이야말로 집단지성일 것이다. 집단지성은 다함께 결과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지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무언가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깨어있음이다. 어있는 시민 같은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지식은 언제든지 도전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도전 앞에서 나의 생각과 지식에 대해 “내가 편견이나 다수의견에 물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반성하는 태도,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결과를 일방적으로 주기만 한다거나 받기만 하지 않고 다양한 방향으로 주고받을 때 집단지성은 올바른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변증법적 과정이야말로 집단지성이다. 위키와 공론장의 발전 가능성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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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174명

갈수록 나만의 생각이라는 것이 참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설명해주신 바와 같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자신의 판단 보단 타인에게 사고를 위탁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 듯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도로 기술화, 디지털화 되어가는 요즘은 '전문가'를 만들기 더욱 어려운 구조가 되어가는 거 같습니다. 집중력이 떨어져 텍스트 읽는 거 자체가 어려워지더라구요. 영상이나 숏츠를 소비하며 시간을 하릴없이 보낼 때가 많아지는데 끊어내고 싶다가도 금단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며 이 문제는 개인의 의지를 벗어났구나 싶었습니다. '전문가' 이전에 책 한권이라도 집중해서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네요ㅠ

정말 말씀대로 결국 깨어있는 시민으로 살아가기가 중요한 것 같네요. 깨어있는 시민이 되기 참 어려운 시대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하면 함께 깨어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서로 깨어있기를 독려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이 따라옵니다 ㅎㅎ 잘 읽었습니다.

미니 비회원

집단 지성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