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산업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저는 그 중 하나가 직업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산업 종사자들에게 직업 윤리가 없다면 잠시 호황기를 맞더라도 오래 갈 수 없고, 침체기에 들어선 후엔 회복할 수 없게 됩니다. 이 관점에서 한국 사회 최고 불신 대상인 ‘언론’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한국 언론의 언론 윤리 이대로 괜찮을까요?
글 싣는 순서
- 조민과 정유라 SNS 받아쓰는 언론 보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기자님, 기사 속 그 코멘트는 정말 전문가 의견인가요?
- ‘기레기’에서 시작된 기자 비하 문화로 언론 보도가 좋아질까요?
- 가이드라인 만들고 안 지키는 기자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한국 언론에는 시민 참여가 충분히 이뤄지고 있을까요?
‘“양갈래 머리 잘 어울리네”…‘말괄량이 삐삐’ 변신 조민 패션 ‘화제’’ 이런 기사 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최근 언론 보도를 보면서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딸 조민 씨의 SNS를 꽤나 자주 마주쳤는데요. 사실 저는 조민 씨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울분 토한 정유라, 조민 공개 저격…“북 콘서트나 쫓아다니는 누가 더 부러워”’ 이런 기사를 접하다보면 조민 씨의 일상을 넘어서 국정농단의 중심인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 씨의 반응까지 알게 됩니다. 언론 윤리 이야기를 시작하며 여러분과 처음으로 나누고 싶은 소재는 ‘SNS, 커뮤니티 받아쓰는 언론 보도’입니다.
SNS, 커뮤니티로 출근하는 기자들
SNS를 옮기는 기사가 최근에 등장한 건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2019년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자녀 관련 의혹 보도에서 인용된 진중권 광운대 교수의 SNS가 있는데요. 당시 진 교수가 조 전 장관의 임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SNS에 게시하면 언론이 이를 옮기는 보도 양상이 보였습니다.
이후에도 유명인 SNS는 기자들의 단골 맛집(?)이었는데요. KBS '질문하는 기자들Q'가 2021년 11월 한 달 동안 유명인 페이스북 받아쓰기 기사를 분석해보니 “모두 6,020건”, “하루 평균 200건”의 받아쓰기 기사가 나왔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기라는 특수성을 감안해야겠지만 상당히 많은 양의 보도가 유명인의 SNS를 옮기는 방식으로 쓰였다는 증거입니다.
기자들의 단골 맛집에는 커뮤니티도 있는데요. 미디어오늘 ‘‘커뮤니티 받아쓰기’ 언론, 이대로 괜찮은가‘의 분석을 보면 “기사 80%가 ‘커뮤니티 받아쓰기’인 기자”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일부 언론사는 ‘온라인팀’으로 불리던 조직이 별도의 계열사로 분리되어 커뮤니티 받아쓰기 기사 양산 체제를 갖췄고요. 이런 현상은 저널리즘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끝없는 가벼움’…SNS, 커뮤니티발 기사가 만든 문제들
SNS, 커뮤니티를 출처로 한 기사가 유발한 문제를 먼저 정리해보려 하는데요. 문제 사례를 같이 보시죠. 2021년 7월 뉴스1 ‘핫팬츠 女승객 쓰러졌는데 남성들 외면…3호선서 생긴 일 '시끌'’은 ‘지하철 내에서 여성 승객이 쓰러졌음에도 남성 승객들이 성추행 누명을 우려해 돕지 않았다’는 커뮤니티 게시글을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기사가 발행된 후 사회 갈등 사안으로까지 논란이 커졌는데요. 이 기사 사실이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뉴스1 보도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해당 사건의 사실관계를 확인한 연합뉴스 ‘[팩트체크] '3호선서 쓰러진 여성, 남성들이 외면' 보도는 가짜’를 보면 사건 접수 및 대응 주체인 서울교통공사가 사실과 다르다고 설명한 대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 사건 당시에는 “신고를 받고 대기하던 역무원이 쓰러진 여성을 승강장으로 옮겨 구호 조치를 했”고, “자신을 의사라고 알린 남성이 여성을 도왔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쓰러진 여성을 돕는 분위기였다”는 현장 역무원들의 반응이 있었다는 겁니다.
당시 한 커뮤니티에 해당 사건을 119에 최초로 신고했다고 주장하는 누리꾼이 등장해 보도를 반박하기도 했는데요. 독자를 비롯해 시민사회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언론인권센터는 논평 ‘취재 없는 기사가 맥락 없는 혐오와 갈들을 부추긴다’에서 해당 보도를 아래와 같이 지적했습니다.
지난 5일, 보배드림 커뮤니티 게시글이 뉴스1을 통해 기사화됐다. (중략) 뉴스1은 해당 게시글에 <핫팬츠 女승객 쓰러졌는데 남성들 외면...3호선서 생긴 일 ‘시끌’>이라는 제목을 붙여 기사화했다. 이후 많은 언론사에서 해당 기사를 받아쓰면서 온라인 상의 젠더 갈등에 불을 붙였다.
(중략)
이번 사건은 서울교통공사나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에 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작성되지 않았다. 특히 최근 여성과 남성 사이의 갈등이 심각한 한국 사회에서 젠더 이슈는 매우 큰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언론사들은 갈등을 증폭시킬 게 뻔한 사건을 사실 확인도 없이 보도했다.
SNS, 커뮤니티발 기사 왜 끊임없이 나올까?
사례를 확인했으니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와보겠습니다. 앞서 확인한 문제 사례는 저널리즘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크게는 ‘황색 저널리즘’이라 불리는 선정적인 가십성 보도의 양산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언론에 대한 반감이 증가하고, 자연스레 불신도 커졌을 겁니다. 더 말하지 않아도 좋은 저널리즘을 구현하는 일이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왜 SNS, 커뮤니티발 기사가 끊이지 않는 걸까요?
문제의 원인을 찾고 싶다면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을 확인해야겠죠. 한국 언론 문제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 중 하나가 ‘조회수 경쟁’인데요. 2022년 기자협회보와 한겨레신문 미디어전략실은 포털 뉴스 페이지뷰를 확인하는 협업을 진행했습니다. 2021년 말 기준 포털사이트 네이버와 모바일제휴를 맺은 매체 73개의 기사 일간 페이지뷰를 조사해 분석한 건데요. 내용을 정리한 기사 ‘네이버에서 가장 많이 읽힌 뉴스, 대부분 '저질·연성화' 뉴스’를 보면 대부분이 질이 낮은 기사였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보다 자세한 분석 결과는 페이지뷰 상위 1~20위 기사를 정리한 결과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질 낮은 기사들 사이에 SNS, 커뮤니티발 기사가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읽힌 기사 5위 조선일보 ‘‘전신 피멍’ 아옳이, 대학병원 검사 결과는 ‘반전’’는 유튜버가 올린 영상을 그대로 전달한 기사입니다. 이어 8위 한국경제 ‘"레깅스만 입고 자주 외출하는 딸이 걱정돼요"’는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확인조차 불가능한 출처에 올라온 글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외에도 페이지뷰 상위권에 오른 다수의 보도가 SNS, 커뮤니티발 보도였습니다.
이유가 조금 명확하게 보이는 듯 합니다. 좋은 저널리즘과 거리가 멀고,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그대로 전달해 오보의 위험이 있음에도 조회수가 높게 나온다는 겁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언급한 조민, 정유라씨의 SNS가 끊임없이 기사로 등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민, 정유라의 SNS를 옮기는 것이 ‘다수가 클릭하는 기사’로 쓸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에 활용되고 있는 겁니다.
언론 윤리 훼손하는 SNS, 커뮤니티발 보도 시민이 막을 순 없을까
결론을 정리해보죠. SNS, 커뮤니티발 보도는 한국 언론의 현실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를 전문으로 다루는 기자와 언론사가 등장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혐오와 갈등 조장, 언론 불신 확산과 같은 저널리즘 훼손이었습니다. 당연히 ‘취재를 통해 기사를 작성한다’는 언론의 기본을 지키지 않는 일이기도 하죠. 종합해보면 ‘클릭수’라는 이유로 언론인들이 스스로 직업 윤리를 외면한 결과였습니다.
한국기자협회를 비롯해 수많은 언론인 단체들은 오래 전부터 저널리즘이 실종된 한국 언론 현실에 대해 ‘반성한다’, ‘개선하겠다’고 이야기 해왔습니다. 하지만 언론인들의 다짐이 제대로 지켜진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욱 연성화된 보도가 쏟아졌고, 자정작용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론인들이 주도적으로 언론 윤리를 바로 세우는 일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SNS, 커뮤니티발 기사 문제도 언론인들이 해결할 수 없다는 게 제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저널리즘의 구현을 포기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를 뉴스 소비자인 시민의 주도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해결을 위한 청사진을 당장 ‘짠!’하고 내놓을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시작할 수 있는 사소한 변화부터 만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변화가 필요할지 여러분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그런 의미로 저는 언론 윤리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 ‘선정적 기사 클릭 안 하기’를 제안해봅니다.
앞서 확인한 것처럼 질이 낮은 기사가 양산되는 원인에는 ‘클릭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이 문제의 해결책은 그들의 목적이자 생존수단인 클릭수를 주지 않는 것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클릭하는 기사의 성향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특정인의 감정적 발언이 그대로 들어간 제목, 클릭을 유도하는 선정적인 제목, 유명인의 이름을 노골적으로 부각하는 제목 등이 포함된 기사의 클릭을 멈추는 겁니다.
물론 제 제안보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댓글을 통해서 같이 이야기해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유명인의 SNS, 커뮤니티 게시글을 그대로 전달하는 보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코멘트
4움찔 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자극적인 제목을 클릭하여 들어가서 별것 아닌 내용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언론은, 미디어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개개인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사회적인 차원의 대처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언론이 조회수에 집착하게 된건 언론, sns 관련된 소비시장이 변화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변화한 시장에서 수익을 얻기 위해 전략을 바꾼 거라고 보입니다.
저는 역으로 시민과 기자들이 왜 커뮤니티로 시선을 돌렸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는데요. 오든 언론이 그런건 아니겠지만, 시민의 신뢰를 잃고 시민들은 원자료를 만들어내고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을 원하지는 않았을지 추측해보게 됩니다.
예전에는 SNS나 커뮤니티가 폭로와 공론을 모으는 유일한 공간이었던 적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기에 커뮤니티에서의 글이 큰 이슈를 만들기도 한 것이죠. 그런데 최근에는 너무 이곳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출처 없는 이야기들만 범람하고 있죠. 그리고 슬프게도 그러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가장 많은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정리된 글 잘 읽었습니다. 언론사에서 근무해 보지 않아 도대체 왜 이런 사소한 가십 내용들이 지면과 온라인에 게시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십이나 사소한 내용들이 중요할 때도 있겠지요. 하지만 언급하신 기사들은 시의성과 공공성을 위해 작성된 기사는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심심할 때 이야기하는 ~~가 ~했더라 하는 수준의 내용들입니다.
이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어떻게든 정해진 기사 건수를 채워야 하는 압박감 때문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아니면, 건 by 건으로 인센티브 등이 지급되기에 이것저것 기사를 작성하려고 하는 건가 생각도 듭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기자와 언론사의 자질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기자의 밥벌이도 중요하나, 요즘 기사들을 보면 기자가 작성한 것이 아니라 직장인으로서의 기자가 작성한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뉴스를 공급하는 공급자들의 처절한 반성과 실천을 출발점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봅니다.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아 졌을 뿐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도 뉴스를 소비하는 일반 시민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개개인의 시민들이 당장 언론 지형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언론) 공급처도 시민들의 요구에 맞춰 변화해가야 하니까요. 해결이 될지 지금보다 악화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작은 실천은 해봐야겠지요.자극적인 기사들을 클릭하지 않거나. 지역구 국회의원들에게 언론 관련 입법을 요청하거나, 제대로 활동하는 언론인이나 좋은 시사 프로그램을 응원하는 등의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시민으로서 마땅한 해결 방법이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