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에서 탈출한 얼룩말은 동정과 귀여움의 대상이 되고, 마찬가지로 시설에서 탈출한 장애인은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만약 얼룩말이 누군가를 다치게 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다친 이에 대한 안타까움과는 별개로, 어떻게든 제압해서 안전하게 시설에 가두어야 할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얼룩말과 장애인은 과연 구분될 수 있었을까.
누구의 평화이고 누구의 폭력인가. 평화와 폭력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수시로 반복하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위험이고 누구의 안전인가. 시설은 누구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가.
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도 얼룩말에게도) 위험천만했던 얼룩말의 탈출을 그토록 재빨리, 우연히 일어난 귀여운 에피소드로 취급해버리는가? 그것은 무엇을 지워버린 채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시도인가? 지워지는 건 무엇인가? 그 평화로운 일상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평화를 깨뜨리고 사회가 위험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장애인은, 존재 자체가 그 위험을 증언하고 있기에 위험한 존재가 된다. 위험한 존재의 등장을 사람들은 반기지 않는다. 그것은 기존의 일상을 다시 보게 만들고, 폭력의 시스템에 실은 동조해왔음을 자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불편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언은 언제나 예언이다. 다치거나 아프거나 늙으면 당신도 시설로 들어가야 한다고, 실은 학교나 군대나 감옥이나 공장까지도 시설의 또 다른 종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형제복지원처럼,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갑작스레 위험한 존재가 되어 시설에 가둬지곤 한다는 것까지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라고 과연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역사를 통틀어 당대에 사랑받는 위험한 예언자는 없다. 그러나 세상의 희망은, 거대한 폭력의 연쇄에 가해자로 연루되어 간 사람들이 아니라, 예언자의 말을 들을 줄 알고 간신히 산속으로 낯선 땅으로 도망쳤던 사람들일 것이다.
얼룩말은 그 온 몸으로 내달려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지하철에 타는 장애인들은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몸뚱아리 밖에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제 몸으로 깎아가며 무언가를 말한다면, 그럴 때 문제는 말하는 쪽이 아니라 듣는 쪽에 있기 마련이다.
코멘트
5이 일을 두고 어딘가에서는 그저 귀엽다고 생각하거나 패러디를 해서 주목을 받으려고 하는 한편, 동물원 폐지 문제나 인간의 잘못된 의인화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어서 관심있게 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관점에서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http://cbs.kr/PaFSTW
또 다른 포인트이지만, 이 기사도 함께 보며 고민해보면 좋겠네요.
저도 탈출한 얼룩말 '세로'를 보며 귀여워 했는데요. 시설 장애인의 상황까지 이어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꼭 그렇게 연결지어 생각해야 하나 되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피해갈 수도 없고 피해가서도 안 될 질문인 것 같습니다. 시설의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들으려 하고 있는 걸까요?
얼룩말의 탈출을 두고 '부모의 죽음 때문에'라고 설명하는 언론 보도들이 나오던데 '부모와 자식을 억지로 동물원에 가둔 후'라는 배경이 빠져있는 경우가 많더군요. 얼룩말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는 동물이라는 이유로 시설에 갖혔지만 장애인, 노인 등은 그들이 소수자, 약자라는 이유로 시설에 갖히고 있습니다. 시설의 종류와 대상을 막론하고 거주와 이동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동물원에 평생 갇혀 살아야만하는 동물의 비참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 좁은 곳에서 평생을 보내야 한다는 것에 감정을 나누고 그러지 말자는 말을 하나씩 보태는 중이지요. 그런데 평생을 그렇게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