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2024 LAUNCH Conference] 연구로 대체 무엇을 바꿀 수 있는데?

2024.01.28

530
6
기후변화에 대해 연구하고 강의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사회문제해결형 연구훈련플랫폼 NAOITH의 "2024 연구원정 LAUNCH Conference"에서 발표될 내용을 발제문의 형태로 작성한 글입니다.

연구로 대체 무엇을 바꿀 수 있는데?

연구자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 혹은 걷고자 하는 여러분. 인터넷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이른바 "대학원" 밈이 내포하듯이, 그 힘들고 고달픈 길을 여러분은 (그리고 저를 포함하여) 왜 선택하시렵니까? 어느 학문 분야에서 발을 딛고 계시든, 연구자는 갈수록 학계와 사회로부터 더 많은 부담을 지게 되고 있는걸요. 더욱 복잡해지는 사회 문제 (wicked problems), 매번 달라지는 연구 지원 정책 및 규제 환경, 점차 심각해지는 파이(pie)의 크기 문제와 분배 문제, 따라가기 벅찬 다변화되고 깊어지는 방법론,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읽어야하는 양이 증가하는 선행 연구들까지. 무엇 하나 매력적인 커리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도 연구로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요?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연구자의 일상은 끊임없는 배움의 고통, 촉박한 데드라인에 맞춰 한참은 부족해보이는 논문 초안을 투고해야 하는 찜찜함, 부정적인 리뷰를 받을 때 오는 답답함, 제일 중요한 어떻게 밥 벌어먹고 살아야할지에 대한 고민의 연속입니다. 세상을 구할 만한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인 연구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연구자라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직군인 박사후 연구원(이른바 post-doc을 포함한 각종 기관에서의 연구위원)이나 교수가 되어서도 같은 고민은 이어집니다. 거기에 직장 내 스트레스, (교수라면) 강의 준비와 수행의 부담, 행정 업무, 실적 관리, 그리고 쏟은 시간에 비해 매력적이지 않은 임금까지. 

아니, 세상을 구할 연구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물론 많은 학자들이 연구와 사회 문제 해결 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해왔습니다. 그 중에는 객관적인 자료 수집과 분석을 통해 작은 단위의 사업이나 큰 단위의 정책의 질적 제고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자료 수집과 분석 자체가 불가능한데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냐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믿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축소판인 '모형'에 기반한 논의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형들은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럴듯한 내용으로 채워져있지만, 이런 논의 끝에 (예비)연구자로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속시원한 대답은 주지 않습니다. 

그럼, 대체 어쩌라는 말입니까?


'유희'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중요한 연구자의 지적 '흥미'

흔히들 학문의 위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인문학의 위기) 라고들 합니다. 도대체가 말이죠, 연구가 사회에 어떤 도움이 될지 생각하지 않고 각자의 지적 '유희'에 따라 연구를 수행한다는 연구자들에 대한 비판을 할 때 자주 등장하는 어구입니다. 아니, 연구자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벅차 죽겠는데, 사회로부터 이런 시선을 받을 때마다 연구자로서 자괴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유희'라는 말은 너무하니, 차라리 조금 더 중립적인 의미의 '흥미'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렵니다. 물론 지적 '흥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지적 흥미는 단순히 유희라고 부르기에는 연구자에게 너무나 중요한 요소인걸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숙명으로 연구의 길에 들어온 분들도 계시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탐구 과정 자체가 재밌어서 그런 선택을 하신 것 아닐까요? 이조차도 없다면, 혹은 사회가 이조차도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한다면, 이 세상에는 필요한 만큼보다 훨씬 적은 수의 연구자가 존재할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소위 '돈도 안 되고 힘들기만 한' 연구자를 과연 누가 하려고나 할까요? 

위에서 '모형'에 대한 짤막한 비판을 하긴 했지만, 또다른 모형을 하나 예시로 들어보려고 합니다. 지식 생태계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지식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는 하지만, 그 둘 간의 관계는 결코 단선적이지 않다는 주장으로 포문을 엽니다. 핵심은 단편 지식 하나 하나는 사회 문제 해결에 크게 기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지식의 공적 가치는 그것이 다른 지식들과 함께 있을 때 발현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생물다양성의 개념처럼 말예요. 어떤 한 생물 종이 당장 우리들에게 유익한 가치를 주지 않는 것처럼 보임에도 왜 우리는 그러한 종들을 보호해야 할까요? 각자의 종들은 생태계 내에서 다른 종들과 상호작용하며 적응하고 살아나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개별 종을 추후에 탐구해보니 인간에게 유익함을 주는 종으로 밝혀질 수도 있기도 하고요. 물론 이러한 논의가 철저히 인간의 관점이라는 비판, 너무나 지당한 비판입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보호받아야 할 귀중한 존재이니까요. 

이처럼 우리가 연구자로서 사회에 제공하는 지식들은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보자면 사회에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1) 다른 지식들과 상호작용 할 때에 더 빛을 발한다는 점, (2) 우리가 결코 미리 그 지식들이 필요할지 필요하지 않을지 완벽히 사전에 알 수 없다는 점, 그리고 (3) 지식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소중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지식 생태계 관점에서는 더 많은 연구자들이 더 많은 지식을 생태계에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고난하고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도 연구자가 지식을 계속 생산하고 다른 연구자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개별 연구자들의 지적 흥미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죠. 미시경제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연구자의 지적 흥미 없이는 (특히 지식 생태계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회에 필요한 수준의 지식이 공급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격차를 메울 수 있는 것이 그나마 연구자의 지적 흥미라는 점이죠.

잠시 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주로 한국과 미국의 농촌 지역에서의 재생에너지 발전시설에 대한 반대 원인과 그 영향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제가 연구를 위해 오래 머물렀던 한 농촌 지역에서 무리하게 태양광 이격거리 완화를 추진하려는 군청에 맞서 집단 행동을 계획하고 있는데, 혹시 성명서를 함께 작성해줄 수 있냐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연구만 하던 저라 많은 부담감을 느꼈고, 에너지와 시간도 많이 써야 하는 작업이었지만, 저는 요청에 감사한 마음에 당장 도움을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면에는 제가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곳의 현재 상황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성명서를 쓰는 것이 당장 연구 성과나 논문으로 귀결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 분들이 어떤 고충을 겪고 있는지 너무 궁금한 걸 어떡합니까. 여기에 더해 성명서를 작성할 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제가 연구를 위해 수집한 자료나 이를 바탕으로 한 제 논문들이 아닌, 그 분들과 함께 하며 듣고 배우며 즐거움을 느꼈던 '사소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거대한 태양광 단지가 들어온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사람들은 어떤 박탈감을 느꼈는지, 그래서 정기적으로 모여 어떤 대화들을 나누었는지... 제가 이 주제에 몸을 담아 커리어를 쌓아야겠다는 생각 너머 호기심과 흥미가 없었다면 '연구에 크게 관련이 없는 것들'로 치부해버렸을 소중한 기억과 가르침들이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고개를 180도 돌리는 올빼미들처럼

과학사회학자 해리 콜린스와 로버트 에반스가 2017년 낸 책,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를 잠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어 서평). 이 책은 과학이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려면 필요한 것에 대한, 이 분야에서 오래 연구한 두 학자의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올빼미"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올빼미를 좋아하시는 분이면 올빼미가 가만히 앉아 앞뒤를 빠르게 왔다 갔다 하며 볼 수 있는 신기하고 귀여운 동물이라는 것을 아실 거예요. 콜린스와 에반스는 연구자들이 모두 이런 올빼미처럼 되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올빼미들의 입장에서 "앞"은 연구가 연구하는 대상인 우리 사회, 그리고 "뒤"는 연구자들의 세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올빼미로서의 연구자는 수시로 앞과 뒤를 살피듯이, 연구에 몰두하느라 연구자하고만 소통하고 그들의 언어로 연구를 이어나갈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언어를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리기에는 당연한 소리처럼 보이겠지만 이들의 주장은 사실 과학사회학에서 이어져온 두 가지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주장은 "과학은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객관적인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문제 해결에 조언을 해야한다"는 주장, 그리고 두 번째 주장은 "과학은 객관성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버리고 사회로 들어가 구성원들의 목소리와 요구를 우선하여 연구 결과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죠. 짧게 쓰느라 많은 것을 축약했지만, 콜린스와 에반스는 "과학이 객관성을 탐구한다는 그 논리와 실천 방식으로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면서도, "그 과학을 하는 연구자들만큼은 사회로 들어가 그들의 언어와 목소리를 닮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말처럼 쉬워야말이죠. 우리가 과연 (예비)연구자로서 두 가지 일을 잘 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떨 땐 너무 연구 자체의 논리와 언어에만 집중에서 이를 그대로 사회에 소개하려고 하니, 어렵고 너무 유식한 소리 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고, 그렇다고 연구에 사회의 관점과 논리를 내포하려고 하니 연구자의 주관과 자의적 해석이 농후하다는 비판을 듣기도 합니다. 말이야 쉽지, 올빼미 다큐멘터리라도 있는 것 다 끌어모아 시청해야 하는 것일까요?


결론: 호기심 많은 올빼미들의 모임이 가꾸는 지식 생태계

다시, 연구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동료 (예비)연구자 여러분. 저도 막 길에 들어선 참이라 어떻게 하자, 저렇게 하자고 이야기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연구로는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고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혼자만의 연구로는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고요. 혼자서는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큼의 "훌류우우웅한" 연구를 하기 벅찬걸요. 애초에 그런 연구가 있을지도 단언하기 어려울 뿐더러요. 연구가 아니더라도 개개인이 열심히 한다고 그 복잡다난한 사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애초에 사회 문제라는게 도대체 뭔데요?)

어떤 글은 구체적인 행동을 갖는 결론으로 끝나야한다고 배웠습니다. 이렇게나 힘들고 암울한 상황에서, 오직 결론만을 위해 그럼 한 가지 제안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 호기심 많은 올빼미가 되어 다른 호기심 많은 올빼미를 찾아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식의 나무에서 "올뺌- 올뺌-" 울어가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뭐라도 물어오자구요. 안일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물어다 온 것 중에 무엇이 "잘 물어온 것"일지 우리가 판단하는게 아니라, 그 나무가, 혹은 나무가 뿌리를 내린 이 세상이 판단할지도 모릅니다. 올빼미로서의 연구자의 소명은 결국 자신이 관심을 갖는 주제에 흥미를 느끼며 계속 탐구하고, 그러면서 앞뒤로 고개를 열심히 돌려가며 탐구한 것을 연구자들과 그리고 사회와 소통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동료 올빼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올빼미가 그러한 흥미를 잃지 않도록 격려하고, 고개를 돌릴 때는 같이 세차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소한' 방법론과 모형들로 싸우고 서로 물어 뜯는게 아니라요. 그래봤자 고요하고 적막한 큰 숲 가운데 한 나무에서 벌어지는 해프닝만 생길 뿐이니까요.

Chaos Nurtures Progress — Three owls on a tree drawing. | Owls drawing, Tree  drawing, Bird artwork

글쓴이: 고인환은 네바다대학교 정치학과 조교수로 일하며 기후변화 및 재생에너지 정치 및 정책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의 재생에너지 입지 갈등과 농촌 주민들의 저항 운동의 원인,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지역 혹은 국가적 차원의 재생에너지 확산 기조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연구하고 있다. Energy Research & Social Science, Energy, PLOS ONE, Climatic Change, 한국정당학회보 등의 저널에 논문을 개재하였다. 글쓴이의 연구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개인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확한 방향제시 고맙습니다

“연구자로서 사회에 제공하는 지식들은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보자면 사회에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1) 다른 지식들과 상호작용 할 때에 더 빛을 발한다는 점, (2) 우리가 결코 미리 그 지식들이 필요할지 필요하지 않을지 완벽히 사전에 알 수 없다는 점, 그리고 (3) 지식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소중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지식 생태계 관점에서는 더 많은 연구자들이 더 많은 지식을 생태계에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읽고보니 이 부분을 반복해 인용하고 싶네요. '아무도 읽지 않을 연구를 왜 하는지'와 같은 회의와 비관을 이겨내고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로 나아가기 위한 ‘동기부여’에 이만큼 좋은 문구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구로는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 “우리 혼자만의 연구로는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며, 동료연구자들과 사회와 소통할 필요에 대해 강조해주시는 것에도 격하게 동의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대학원 생활을 할 때, 재미 있는 질문이 아니면 교수님께 곧잘 가르침(이라고 쓰고 읽을 땐 따끔한 조언)을 들으며 의기소침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는 오직 연구만을 위한, 연구를 하기 위해 억지로 짜낸 질문들을 많이 던져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진정 연구를 살리고 연구자를 살리는건, 정옥다예님 말씀처럼 호기심과 흥미가 아닐까 생각해요!

흥미와 호기심! 저는 세상을 구할 것은 호기심이고 관계를 구할 것은 흥미라고 생각하는 질문쟁이로서 지식 생태계 속 '올빼미'가 정말 반갑네요! 특히나 '다른 지식들과 상호작용 할 때에 더 빛을 발한다는 점' 과 '지식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소중할 수 있다는 점' 이라는 부분이 기억에 남아요. 지식을 사람으로 변경하면, 단절된 우리의 관계 사회에도 참 필요한 말이라고 느껴져요.
올빼미 얘기가 인상깊게 와닿네요. 말씀대로 사회와 연구주제를 자주 오가며 살피면 좋겠군요. 주변 연구자들을 보며 연구는 '덕질'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연구는 연구생태계와 사회에 기여하는 게 다르다는 게 차이이지 않을까 싶구요. 저는 연구의 세계를 잘 모르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저같은 사람도 재미난/의미있는 연구들을 많이 접할 수 있을까 궁금해지네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라니! 듣고 보기만 해도 힘이 나는 느낌입니다. 뭔가 연구자들은 항상 고뇌에 휩싸여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요. 올빼미 같은 꾸준한 흥미 너무 중요해 보입니다.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 같아요.